수구효심(首丘孝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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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효심(首丘孝心)

김창식

2013년 01월 16일 (수) 01:41:38

며칠 전 세상을 떨게 한 조폭 두목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사회적 물의를 자아낸 인물인지라 신문과 방송에서도 그의 죽음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지요. 사뭇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둠과 잇닿은 삶을 살며 나름 갈등을 겪었을 법한 한 인물과의 조우가 생각납니다.

1980년대 초, 서울역에서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한일빌딩'에 직장(항공회사) 사무실이 있었어요. 점심을 먹고 오다 지갑을 소매치기당했습니다. 이 궁리 저 궁리하다 짚이는 바가 있어 부근의 '광택(구두세탁)주식회사' 간이 철제문을 밀고 들어섰지요. 안면 있는 20대 초반의 젊은 사장에게 여차여차 상황을 설명하고 연통을 넣었죠. 다음날 사장이 말하더군요. "보자시는데요." "누가?" "우리 큰형님이요!"

'역전앞갈대'로 불리는 그와 서울역사 뒤쪽의 중국집 '외백'에서 첫 대면이 있었습니다. 옆이 트인 붉은 비단 옷을 입은 '꾸냥'이 구석진 방으로 안내하더군요. 그는 40대로 보이는 찐빵 같은 외모의 사내였지요. 영화 '제3의 사나이'에 나오는 오손 웰스처럼 생겼어요. 머리는 올백으로 넘겼고 포켓에는 행커치프를 꽂아 한껏 멋을 부렸더라고요. 졸린 눈에 말도 느릿느릿했는데 웬일인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니까요. 아마 기세에 눌렸던 모양입니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자리에 앉았는데, 원형 식탁엔 벌써 요리가 차려져 있었죠. 한켠에 놓인 양담배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날따라 어찌나 담배가 피우고 싶던지. 떨리는 손으로 한 가치 빼물었는데 불이 잘 붙지 않았어요. 거꾸로 담배를 물고 있었던 것이죠. 어찌할 바를 모르던 중 담배가 두 동강 나는 바람에 재떨이에 구겨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지요. 흐릿한 눈에 잠깐 이채가 스치는가 싶더니 그가 무엇인가를 툭 던졌어요.

"확인해 볼 것이더라고."
내 지갑이었는데 내용물도 이상이 없는 것 같았어요.
"보고를 받았제. 주민증 까봉께 동향이더라고."
그때의 주민등록증엔 본적이 적혀 있었죠. 따져 보니 그는 초등학교 선배였어요. 그렇게 해서 그와 '이물 없는' 사이가 되습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처음 나를 만났을 때 그도 '솔찬히' 당황했다고 합니다. 자기 앞에서 터프하게 담배를 꺼내 피운 사람도 처음인 데다, 그 선량한 시민이 담배를 꺾어 아작까지 냈으니.

그는 지탄받는 전국구 폭력배라기보다 잡상인, 구두닦이, 걸인, 넝마주이 등 당시 소외당하는 직군을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생계형 조직의 책임자 급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가 관할하는 구역은 우리 동네, 그러니까 서울역과 염천교를 아우르는 노른자위 지역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길을 걷기라도 하면 수상한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분분히 인사를 하기도 했어요. 내 어깨에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죠.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며 그런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요.

'역전앞갈대'는 첩실의 자식으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무단 상경하여 서울역에서 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앵벌이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지역 맹주 위치에 오른 것이죠. 유머러스하고 고향 사투리를 써서인지 말투도 정감이 있었어요. 또 가방끈이 짧은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어서 문자를 즐겨 사용하기도 했고요. 한번은 별명이 남세스럽게 '갈대'가 뭐냐고, '상어'나 악어' 같은 격에 맞는 사나운 이름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권했더니 표정이 엄숙해졌어요.

"나으 소싯적 별명잉께. 바꿀까 생각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제. 연(然)이나, 정도 들었것다 고향 갈대밭이 눈에 삼삼한 것을 어쩌겄는가. 자네는 학문이 깊으니 '수구효심(首丘孝心)'이라고 들어봤제? 여시가 죽을 때 고향을 그리는 마음 아니당가?"
"성님, 수구초심(首丘初心)인데요!"
그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읊조리더군요. 어찌 보면 회한에 젖는 것 같았어요.
"아따, 이 사람, 노파나 할망구나! 멀 그리 따져쌓는가? 하먼, 나가 이 사업을 함시로 맴이 편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제. 그간 부끄러봐 고향에 못 내려가 봤단 말이시."

그와의 인연은 일 년여를 끝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와 교유한다는 것이 내심 꺼림칙하던 차 마침 해외근무를 떠나게 되었거든요. 휴가 차 귀국하여 여전히 현역인 광택회사 젊은이에게 그의 소식을 수소문했습니다. 근데 '역전앞갈대'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에요. 잠시 그가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는데 언뜻 눈앞에 가창오리 떼 날아오르는 갈대숲이 펼쳐졌어요. 망연히 낙조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도 함께.

김윤옥 (39.XXX.XXX.180)

세상은 자꾸 발전해서 눈부시다 하는데
왜 우리는 지나간 옛날을 그리워만 할까요.
하찮은 에피소드 한 토막도 꺼내 볼 수록 빛납니다.
옛날 어렵던 그 때 보다 결코 나을 것 없는 오늘이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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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2 18: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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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XXX.XXX.48)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예나 지금이나, 그가 누구이든,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니까요, 김윤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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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9 22: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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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250)

삶이 천층 만층으로 다양함을 관조할 수있는 나이에서는 .....
문학도로써 짧은 글이 장편소설도 될 뻔한 내용이네요.
반듯한 직없이 별로 없던 그시절이 되새김질 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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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6 17: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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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XXX.XXX.98)

차 선생님 말씀대로 부끄러운 경험을 콩트식으로 구성해보았습니다.
그 시절은 풍요롭진 못했지만 소박한 인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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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7 10: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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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co (117.XXX.XXX.248)

아따, 시상을 허벌나게 빨리 알아부러서 모르긴혀도 수구효심허고 있을꺼요. 사는 형태는 달라도 맘 한번 고쳐묵으면 교과서적인 삶을 산 우리보다 더 사람답게 열심히 산당께요. 모르긴 혀도 '역전앞갈대'도 선상님을 낙조속 갈대숲에서 생각허고 있을 거시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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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6 1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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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XXX.XXX.98)

그러고보니 세상이 참 빨리 지나가는 군요. 30여년 전 일이니까요.
지금도 그 곁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옛서울역사 주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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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7 10: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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