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父女) 대통령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방석순 프리즘

부녀(父女) 대통령

방석순

2013년 01월 18일 (금) 01:56:46

미국에서 사는 친구가 재미있는 메모 쪽지를 보내왔습니다. ‘우연한 일치’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 박정희는 5ㆍ16으로 정권을 잡았고, 박근혜는 51.6% 득표로 정권을 잡았다.
- 박정희 집권 후 51년 6개월 만에 박근혜가 청와대로 들어간다.
- 육영수는 문세광의 총탄에 숨졌고, 박근혜는 문재인을 투표로 이겼다.
- 박정희는 18년 간 집권했고, 박근혜는 18대 대통령이 되었다.
- 박정희는 61세에 대통령으로 죽었고, 박근혜는 61세에 대통령이 되었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승리하자 누군가 심심풀이로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숫자들이 실제와 일치하는지는 몰라도 상황은 그럴 듯해 보입니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벌써 한참 전부터 비슷한 글들이 떠다닌 것 같습니다. 그 새 수없이 태평양을 건너 오가던 걸 뒤늦게 받아본 모양입니다. 대통령 아버지에 대통령 딸! 그게 바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니 새삼 놀라운 기분이 듭니다.

물론 가족 내 권력 승계의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딸 인디라 간디-외손자 라지브 간디(인도). 아버지 줄피카르 알리 부토-딸 베나지르 부토-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파키스탄). 아버지 디오스다도 마카파갈-딸 글로리아 아로요, 남편 베니그노 아키노-부인 코라손 아키노(필리핀). 아버지 무하마드 수카르노-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인도네시아). 아버지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어머니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딸 찬드리카 쿠마라퉁가(스리랑카).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시리아)… 3대 세습 독재의 북한은 말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미몽 속에 헤매는 아시아권의 권력 승계 구조 같아 어느 경우건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도 ‘독재자의 딸’ ‘얼음공주’ 등등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적잖이 들었습니다. 대선이 끝난 후에는 “밥맛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보았습니다. 거부감이 가시지 않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 국민이 박근혜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더구나 어느 때보다 세계 경제가 어둡고, 주변 정세가 어수선하고, 국내의 지역적, 이념적, 세대 간 갈등이 극심한 이 시기에. 두 차례나 수렁에 빠진 여당을 구한 지도력?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 원칙과 약속에 철저한 강직함과 신뢰성?

솔직히 아버지 ‘박통’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의 등장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박통’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분분합니다. 경제 발전의 터전을 닦았다는 찬사. 유신 독재에 대한 비판. 그러나 독재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 정치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기, 국가 경제가 극도로 피폐했던 그 시기에 오늘과 같은 국가 발전의 기틀을 다진 공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때 누가 했어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가던 나라들의 오늘날 혼란상을 보면 공과는 보다 분명해집니다.

‘박통’의 딸 박근혜 대통령을 선택한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좌고우면하지 말고 오로지 나라를 바로세우는 일에 매진해 달라.’ ‘아버지가 닦은 경제발전의 터전 위에 딸이 참된 복지국가의 초석을 세워 달라.’

이런 희망적인 기대에 냉소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일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내뱉는 축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유신의 부활이다.” “독재자의 딸이니 독재를 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가당치도 않은 망발입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먼저 몸을 던져 막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이 뒷방 늙은이로 취급하는 전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에게 문정희 시인의 대성일갈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죽음도 불사하며 세상을 뒤엎던 기개, 쩌렁쩌렁한 남자들은 어디 가고 나긋나긋하고 비겁한 잡것들만 오글거리는가.”

대선에 뛰어들며 박근혜 후보가 던진 화두는 ‘국민 대통합’이었습니다. 통합을 향한 그의 발걸음도 주목할 만했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 산업화의 과정에서 짓밟혔던 사람들을 찾아 용서와 화해를 구했습니다. 물론 그의 행보를 의심하고 저지하는 축도 없지 않았습니다. 목표한 국민 통합으로 가는 길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대통령 당선 직후 첫 인사에서는 “민생 대통령이 되어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버지가 독재자 소리를 들어가며 일군 경제 발전 위에서 딸이 그 과실의 공정한 수확과 균형적인 분배를 책임지겠다고 다짐한 셈입니다.

한 달 후엔 박근혜 새 대통령이 공식으로 대한민국호를 이끌게 됩니다. 그가 진정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국민 대통합’의 길을 열어갈지, 힘없고 못 가진 자들의 위로가 되어줄지, 기대가 큽니다. 부녀(父女) 대통령 미운 게 우리가 갈등하고 못 살아야 할 이유가 됩니까. 박정희 박근혜 부녀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고달픈 민초들을 위해서 박근혜 정부가 멋진 성공사례를 만들어 가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