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성(巨聲) 베니아미노 질리와 문화 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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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2013년 01월 31일 (목) 01:26:25

1950년대 중반, 서울 거리는 참혹한 전란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 모두가 시름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시내 극장가에 불어 닥친 이탈리아 가곡 열풍은 당시 사회에 적지 않은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7)를 영화화한 <위대한 카루소(The Great Caruso)>가 개봉되자 온 시내가 들썩거렸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이탈리아 가곡이 울려 퍼졌고, 카루소 역을 맡은 미남 테너 마리오 란자(Mario Lanza)의 미성(美聲)에 서울 거리가 흠뻑 취했다고나 할까요. 돌이켜 보면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리아가 국내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한몫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모두가 엔리코 카루소, 마리오 란자를 외칠 때 카루소보다 더 유명한 이탈리아 성악가 베니아미노 질리(Beniamino Gigli, 1890~1957)가 있다고 외롭게 ‘외치’는 국내 성악가가 있었습니다. 필자의 고교 음악 선생이신 박일환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성(巨聲) 베니아미노 질리의 음악성이 카루소보다 훨씬 상위에 있다고 주장하신 분입니다.

1957년 어느 날, 한 일간지에서 박 선생이 기고한 ‘성악계의 거성 베니아미노 질리 선생의 타계를 애도하며’라는 추모사를 읽고 새삼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생은 거성 베니아미노 질리 선생을 한 번도 만나보지 않으셨지만, 당시 수집한 LP판에서 흘러나오는 그분의 노래만 듣고도 한없이 영모(永慕)하셨던 것입니다. 그 무렵 필자가 찾아뵙고 독일로 유학 간다고 인사드렸더니, 대뜸 “그럼 로마에 들르겠군!” 하시면서 베니아미노 질리 선생 댁을 찾아가 꼭 안부 인사를 전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바람에 “네” 하고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뵙고나올 때 필자 손에는 베니아미노 질리 선생의 주소가 적힌 쪽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당시 독일까지 직항하는 항공편이 없어 홍콩, 방콕, 카라치, 테헤란, 베이루트, 로마를 거쳐 며칠 걸려 프랑크푸르트에 가던 시절이라 로마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질리 선생 댁을 찾아가 그분의 미망인을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미망인은 서울의 ‘미스터 박’이라며 반갑게 대해주셨습니다.

그 인연으로 1960년 로마 올림픽 때 다시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마침 이탈리아 오페라단을 이끌고 서울을 다녀왔다는 거성 베니아미노 질리 선생의 따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필자를 맞이해주었습니다. 담소하는 중에 “오페라단이 홍콩, 서울, 도쿄를 다녀왔는데 가장 인상적인 곳은 서울이었다.”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셨습니다. 예상치 않은 칭송을 듣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서울은 공연장에서 노래할 때 입김이 나올 정도로 너무나 추웠다. 그런데 한국 청중은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았다. 일본이나 중국(홍콩) 청중보다 단연코 뛰어난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다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입니다! 세계적 성악가 베니아미노 질리 선생의 따님이며 저명한 성악가가 한국인의 음악성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세계 음악계, 특히 유명 오페라단에서 한국 성악가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독일의 전통 가곡(Lieder)을 독일인보다 더 훌륭하게 해석하며 부른다고 해서 독일에서 더 사랑받는 베이스 연광철(47세), 그리고 지난해 독일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리하르트 바그너 페스티벌(Richard Wagner Festspiele)’에서 주연을 맡아 오페라계에 해성처럼 나타난 베이스바리톤 새뮤얼 윤(41세)의 등장을 지켜보면서 근래 세계 음악계에 일고 있는 한류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울러 베니아미노 질리 선생의 따님이 1950년대 말에 이미 한국인의 음악성을 보고 오늘의 문화 한류를 예견했구나 생각하니 전문가의 깊은 성찰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새삼 떠올리면서 절로 숙연해집니다.

팝 음악에 일고 있는 세계적 한류 열풍도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 질주해나가리라는 기대감으로 이어지니 그저 기분도 좋고 자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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