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회 생일을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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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회 생일을 보내고

황경춘

2013년 02월 27일 (수) 01:58:08

평소 나이에 관한 화제는 되도록 피하고 있습니다. 연령상으로 사회의 비주류에 속하게 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희소가치가 붙을 정도로 나이를 먹게 되니, 애써 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나이를 잊고 젊게 사는 것이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참고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 두 달 사이, 불가불 세 차례나 나이 문제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2013년 새해를 맞이한 뒤 한 달 남짓 하여 민족의 명절 설이 다가오고, 보름쯤 뒤가 제 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 다 본인이나 주위 사람이 자연히 제 나이를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마침 86세 생일을 두 달 앞둔 로마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고령으로 인해 교황으로서의 공식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교황청 사상 두 번째의 교황 사임 발표를 하였습니다. 24일의 마지막 정례 일요일 ‘정오 미사’에 모인 10만명 신도에게 “나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연령과 체력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교회에 봉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법률상 국민의 의무나 권리를 논할 때를 빼고,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나이 계산법을 아직 쓰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 살 더 먹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릴 적에 "동지 팥죽과 설날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며 자란 우리 세대에는 역시 전통 명절 설을 지나고야 한 살 더 먹는다는 쪽이 실감이 납니다.

우리 전통 계산법에 의하면 12월 31일에 태어난 아이도 다음날 벌써 두(2)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력을 기준으로 하느냐 음력 생일을 따르느냐에 따라 한 살 차이가 나게 됩니다. 사주나 토정비결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니, 양력 정월 생으로 호적에 올라 있으나 음력 섣달에 태어난 사람은 십이지(十二支) 띠가 달라 혼란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외국인과 나이를 따질 때에는 반드시 만(滿) 나이를 말하고, 생일이 멀지 않으면 "두 달이 지나면 만으로 50이 됩니다." 식으로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저는 외국식의 이 만 계산법을 즐겨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두 계산법 사이에는 한 살, 아니 어떨 때에는 두 살이나 차이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2월 26일이 제 생일이니, 이날로 만 89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통 나이 계산으로는 이미 2013년이 시작되는 날로 아흔 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외국인에게는 만 88세 10개월 또는 "2월 말에 만 89세가 된다"고 돌려 말할 수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나이 친구들 중에 난청으로 보청기를 사용하면서도 일상 회화에 불편을 호소하거나, 무릎 관절통으로 보행에 지장을 겪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다행히 저는 두드러진 신체장애는 아직 없어, 건강한 몸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습니다.

지난해 류머티즘 통증으로 양손에 물리치료를 받으며 한동안 컴퓨터를 쓰지 못한 불편을 겪은 일이 있었지만, 꾸준한 치료와 운동으로 거의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노화된 몸도 어느 정도는 재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평소 하던 스트레칭 운동을 더욱 성실히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 정신적 노화현상은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요. 그러나 몸이나 기억력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식으로 급속도로 변화하는 것까지는, 감각이 둔해서인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두뇌의 순발력은 10년 전, 아니 5년 전에 비해서도 답답할 정도로 둔해졌습니다.

완전히 망각한 단어는 아닌데, 말이나 글로 옮기는 데 약간 시간이 걸리거나 다른 것과 혼동하는 수가 가끔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혹시 요즘 사회문제로 자주 화제에 오르는 노인 인지장애(認知障碍) 현상의 시초가 아닌가 하는 공포가 머리를 스칩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뚜렷한 예방법이나 치료약을 아직도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난치병 중의 하나 아닙니까. 배우자나 가족 그리고 가까운 친지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 한마디는 할 수 있게 저에게 이 병만은 피하고 생을 마감하는 행운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분에 넘친 생각일까요.

며칠 전 대전에서 아이들과 함께 탄 택시의 기사가 제 나이를 정확하게 알아맞혀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아버님 걸음걸이나 몸짓이, 해병대 근무 30년을 마치고 아직도 가사를 놓지 않는 금년 아흔인 저의 아버지와 똑같습니다. 제가 금년에 환갑인데 아버지 명령에는 꼼짝 못합니다.” 이렇게 농담 섞어 말하며 10년 장수하시고도 남음이 있을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아저씨, 10년 뒤에 우리 또 대전에 올 테니 그때 만납시다.”라고 한 아이가 말하고 웃으며 식당가 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외손자 대학 졸업식을 마치고 점심식사 가는 길이었는데, 저는 “글쎄, 10년을 더...”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한희주 (114.XXX.XXX.98)

선생님의 89회 생신 축하드립니다.
'10년을 더...' 저도 그리 되시리라 믿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장수하셨던 피천득 선생님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청복을 누리고 계시는 선생님의 글이 제게는 희망이자 위안입니다.
더욱 평온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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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8 06: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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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깅 (110.XXX.XXX.70)

저도 피천득 선생님의 곱게 깨끗하게 살다 돌아가신 모습을 항상
흠모하고있습니다. 성원에 힘입어 노력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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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8 17: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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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rio (210.XXX.XXX.46)

노익장을 과시해주세요. 멋지십니다. 10년 후에도 변함없이 칼럼을 쓰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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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7 16: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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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0.XXX.XXX.70)

고맙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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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8 17: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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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리 (24.XXX.XXX.229)

저도 머리가 심히 아픈 탓인지 자주 무엇을 잊어버리고 정리도 잘 안되고
순발력도 떨어지고 무언지 생각하다가도 멍하고 한답니다.
이 나이에 벌써 이러한데 전 선생님이 부럽습니다.
앞으로도 더 오래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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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7 13: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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