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지 않으려고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오마리 구름따라

후회하지 않으려고

오마리

2013년 03월 08일 (금) 01:21:55

간밤에 스노 스콜이 퍼붓더니 세상이 얼음사탕으로 변했습니다. 멀리 솔숲의 소나무들이 눈과 바람에 쉼 없이 흔들립니다. 일몰 무렵의 시간이지만 하얀 눈꽃들이 솔잎 사이사이로 흩날리는 풍경은 안개가 자욱이 낀 이른 새벽 같습니다. 4월에도 눈이 내리는 이곳, 3월이 왔지만 아직도 영하 15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추위에 온통 하늘과 땅이 하얗게 얼어붙어 인적이 끊긴 주위는 적막합니다. 55세 이상 연령대의 사람들과 시니어노인들만 사는 단지여서 눈만 내리면 모두 ‘방콕’하고 들어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이 저녁, 집 옆 공터로 50미터 거리를 눈밭을 헤치며 달려갔습니다. 홀로 계신, 87세의 옆집 할머니 댁에 저녁식사를 가져다 드리려고 후드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을 한 것입니다. 행여 음식이 식을까봐 음식을 덮은 상보가 날아가지 않도록 움켜쥔 두 손이 시렸습니다. 4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댁에 식사를 가져갔더니 무척 반가워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벌써 할머니의 남편 1주기가 돌아왔습니다. 작년 이맘때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분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황망하고 허망한 경험이었는데, 재작년 여름 어느 날 자신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느냐며 할머니의 남편이 초대의 말을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 선뜻 답을 못했던 이유는 그분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차별을 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선교사로 일본에서 수십 년 선교하다가 모국으로 돌아와 노후의 삶을 보내고 있는 부부였는데 할머니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할머니의 남편은 일본인과 한국인에 대한 비교의식이 있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의 남편이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죄책감 같은 것이 내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 여름 저녁 식사 초대에 흔쾌히 대답을 드리지도 않고 시간만 보내다 그분이 그만 돌아가신 것이 여간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건만 왜 거절과 같은 침묵을 그리 오랫동안 했을까?
그냥 껄끄러운 느낌 정도는 아닌 척 숨기며 편하게 식사 한 끼쯤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분에게서 인종차별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도 어쩌면 선입견일 수도 있었을 테고, 하며 별별 생각과 함께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언제나 때늦은 후회를 하고 또 하면서도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살아온 나에게 이번 일은 깊게 반성하고 돌아보는 계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어둠이 내리면 홀로 남아 있는 할머니의 집 창문을 멀리서 바라보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입니다. 창문에 불빛이 어른거리면 안심이 되고 집이 어둠에 싸여 있으면 걱정이 됩니다. 그럴 때는 그 집 창문 앞까지 다가가 집 안의 동정을 살피거나 전화를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작은 수고로움이 할머니의 고적함을,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저녁식사를 가져다 드리자, 그것이 그녀를 기쁘게 하지 않을까, 마음도 따뜻해질 것이다. 홀로 남은 할머니에 대한 연민이거나 어쩌면 돌아가신 할머니의 남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이후 나는 거의 매주 식사를 챙겨 갑니다. 다행히 할머니가 동양음식을 모두 좋아하셔서 음식 만들기가 어렵지도 않으니 쌀밥이며 생선튀김 반찬 샐러드 과일까지 고루고루 예쁘게 담아 갑니다. 오늘은 탕수육을 만들었는데 할머니의 함박 같은 웃음을 보고 오는 발걸음이 추위를 잊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이런 후회가 되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밥과 요리 하나만 차려드렸다면, 샐러드와 과일까지 챙기지 않았다면 손쉽게 더 자주 식사를 가져다 드릴 수도 있을 텐데.

요사이 가끔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니 사람들과의 교감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모두가 물질적인 것들이 없인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녁 한 상, 차 한 잔, 술 한 잔, 생일이나 주요 기념일 등까지 기분 좋게 챙기던 내가 이젠 그것들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앞으로의 남은 삶을 후회 없이 보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나의 관심과 정을 변함없이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뿐만이 아닌 노후의 생활 설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이젠 노후가 눈앞에 닥치니 예전처럼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가 쉽지 않아졌는데 아마 이런 점이 우울해지는 주된 요소가 아닌가 합니다. 늘 받기에는 서투르고 주기만을 좋아하던 내가 주기에 앞서 이것저것을 따져본다는 것, 서투른 셈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어서 짜증이 나고 영 기분이 찜찜합니다. 그러다보니 그게 그렇게 큰 심리적 압박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상황 변화를 깨닫게 된 동기는 작년 한국 방문 길에서였습니다. 부모, 자식, 형제, 친척, 친구 사이에도 주고받는 물질의 크고 작음이 인간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개인 받는 사람에겐 하찮은 것일지라도 주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을, 설명이 없는 한 상대방은 그것을 알 리가 없으니 참 쓸쓸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떠나는 친구를 위해 준비한 한 병의 사이다와 김밥 그리고 편지, 그 소박한 우정에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한없이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수놓은 손수건 한 장을 오랜 세월 간직하며, 20대 초반에 저세상으로 가버린 친구를 지금도 그리워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소소한 것들을 주고받았지만 그 무엇과 비교될 수 없는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은 편지나, 한밤의 음악방송으로 띄워주던 시 한 수와 음악, 집 마당에서 꺾어왔노라고 내밀던 모란 몇 송이를 어떻게 고가의 번쩍거리는 선물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시대의 낭만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친교와 애정을 전달하는 표현 방법이 물질적 수단 없이는 불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금전이란 통용수단 없이는 그 방법이 불가한 시대입니다. 우편집배원이 가져오는 편지 한 장에도 행복했던 시대가 사라져버리고, 씁쓸하게도 이 시대는 물질의 질량이 크면 사랑과 관심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오늘 카드 몇 장을 사러 기프트 숍으로 향했습니다. 카드를 보낼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카드 숍의 진열장을 기웃거립니다. 형형색색의 예쁜 카드들이 넘쳐나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어떤 카드가 받는 이의 생일을 기쁘게 할까? 그 사람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카드는 어떤 색상으로 그려진 그림일까? 카드를 고르는 시간은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오랜 시간 쇼핑을 하며 선물을 준비하는 피곤한 과정보다 솔직히 몇 장의 카드를 사는 시간이 훨씬 경쾌합니다. 그 사람만을 생각하며 고른 카드 위에 그 사람만을 떠올리며 쓴 진솔한 글이 있다면 비록 한 장의 카드이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으니까요.

아무리 황금만능 시대라고 하지만 진정성이 담긴 것이라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믿고 싶습니다. 꾸밈없는 한마디의 말, 잔잔한 배려와 관심이 담긴 글로 나누는 관계 또한 물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처럼 영하를 밑도는 추운 겨울 저녁, 외로운 이에게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하려 어둠 속을 달려가는 것도 내 방식의 관심이며 사랑입니다.

나는 이처럼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내 식대로 꾸밈없는 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게 비록 커다란 선물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나의 끝이 올 때, 결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노라고, 그저 부끄러움이 몇 점 있었던,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던 생이었노라고 하늘을 향해 말하고 싶습니다.

wheeling (67.XXX.XXX.78)

마음에 뜻하는일 할수있도록 건강하기 바래요.
따스한 이야기에 감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