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좀 맡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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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좀 맡아주세요”

임철순

2013년 03월 11일 (월) 04:09:21

정필례 선생님은 예뻤습니다.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이 보기 좋았던 정 선생님은 학교 행사 때면 도맡아 풍금을 치곤 했습니다. 얼굴만 따진다면 우문자 선생님이 더 예뻤다고 해야겠지만, 꽃으로 치면 서로 다른 꽃이었습니다. 정 선생님보다 나이가 적은 우 선생님은 아마도 신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 선생님은 1958년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의 첫 담임교사였습니다. 몇 반이었는지는 잊었지만 약간 탁한 듯한 목소리,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왔지만 남들보다 크고 둥근 얼굴, 운동장에서 풍금을 치러 나갈 때 조금은 멋쩍어하던 표정, 바람에 하늘거리던 개나리색 원피스가 생각납니다.

1학년을 마칠 무렵, 생물교사였던 아버지가 당신의 저서 <알기 쉬운 생물실험>을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시골 초등학교 교사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이지만 한 학년 동안 아이를 가르쳐준 데 대한 사은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것도 뭔가 더 있었는데 내 기억에는 그 이상한 책만 남아 있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신문지로 싼 물건을 주셨습니다. 소중하게 집에 들고 가다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호호 손을 불어가며 풀어보니 연필 지우개 공책 등 학용품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정필례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2학년으로 올라간 직후 담임이 되신 우문자 선생님과 정 선생님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됐습니다. 말하자면 학생 인수인계를 한 셈인데, 정 선생님은 “애가 수가 좁아.”라고 말했고 우 선생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계단 밑에 서 있던 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정 선생님의 눈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가 좁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괜히 아무에게도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궁금해 하다가 어떻게 해선지 그게 수줍다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수줍은 것처럼 보였던 나는 장난도 꽤 쳤고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떼다가 우 선생님께 들켜 혼난 일도 있습니다. 1학년 때는 정 선생님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신용(信用)을 주었는데, 2학년 때는 영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신용을 주는 것은 선생님이 특정한 아이를 편파적으로 이뻐하고 칭찬하는 걸 말합니다.

3학년 때의 담임도 여선생님이었으나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 선생님은 여름방학 중에 아기를 낳은 직후 돌아가셨습니다. 날계란을 잘못 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몸이 안 좋았는지 며칠 결근했을 때 임시 담임을 맡은 선생님이 급장인 나에게 사택으로 병문안을 가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작은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는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고 뭔지 겁나서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4학년 담임선생님은 최악이었습니다. 아버지 친구였던 그분은 무슨 일에든 나를 끌어들였고, 나를 본보기로 혼냈습니다. 목에 때가 끼었다고 때리고, 선생님의 아들이 이게 뭐냐고 화내고, 네 아버지는 너만할 때 안 그랬다며 꾸짖었습니다. 친구의 아들은 더 엄하게 다뤄야 한다는 모범이라도 보이려는 듯 유난을 떨었습니다. 하도 괴롭혀서 학교에 가기 싫었습니다. 공부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자라서 생각해 보니 나를 그렇게 괴롭힌 데는 학교 때의 라이벌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보복심리 같은 것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방학 중 작두질을 하다가 손가락 하나를 잘리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하게 돼 2학기 때 담임이 교체됐습니다. 솔직히 나는 되게 좋았습니다. 이제야 좀 숨을 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새 담임은 한마디로 변태였습니다. 남자아이들을 벌 줄 때 걸핏하면 고추를 꺼내게 해 희롱하고, 아랫도리를 다 벗고 엎드리게 한 뒤 몽둥이로 궁둥이 사이를 간질이며 낄낄거렸습니다. 시골에선 학교에 늦게 보내는 경우가 많아 이미 성인 같은 아이들도 있었고 남녀공학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누가 뭘 가져다주는 일도 별로 없었지만, 그 선생님은 돈이든 뭐든 먹는 것도 꽤나 밝혔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담임선생님이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담임선생님은 어떤 특정한 인간형이나 여러 유형을 보여주는 원형(原型)과 같이 각인됩니다. 좋은 담임선생님이 남겨준 추억이나 가르침은 평생 동안 삶의 지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신학기에도 각급학교에서는 담임 배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서울 강북의 한 중학교는 경력 10∼20년차의 중견 교사 중 상당수가 담임을 기피하는 바람에 5년차 이하와 기간제 교사 위주로 겨우 채웠습니다. 그래도 담임이 없는 두 학급에는 전근 오는 교사를 일단 배치했습니다. 중3학년 담임 중 3분의 1을 기간제 교사가 맡은 학교도 있습니다. 고3 담임은 진학지도가 힘들고 퇴근도 늦어 기피 1순위입니다.

일도 고되고 걸핏하면 아이들과 학부모가 교사를 때리는 교권침해를 겪는데 무엇 때문에 담임을 맡으려 하겠습니까? 특히 중학교의 담임기피 현상이 심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는 10년째 월 11만원으로 묶여 있는 담임수당을 20만원으로 올리려 했으나 관련 부처 협의과정에서 17만원으로 줄었습니다. 게다가 초등 보전수당 및 원로수당 등 교직가산금은 폐지키로 하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극력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교원수당체제 개편안은 마지막 국무회의에도 상정되지 못한 채 박근혜 정부에 숙제로 넘겨진 상태입니다.

정부 예산은 당연히 조정해야 하지만, 일선 교사들의 고충과 교육현장의 여러 문제를 생각할 때 교육부의 원안이 충실히 반영됐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수당 인상만으로 담임기피를 비롯한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런 배려라도 하면서 담임을 기피하지 말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사들도 담임 맡기를 촉구하는 교원단체나 일반 학부모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 퇴직교장은 “교직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래도 가장 보람을 느꼈던 해는 담임교사를 맡았던 해였다. 지금도 성공해 찾아오는 제자들은 담임반 아이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선생님들이 이 말의 의미를 몰라서 담임을 기피하는 건 물론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과 교육을 위해서 좀 더 힘을 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창식 (1.XXX.XXX.41)

제게도 잊지못할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자 문예반선생님)이 계십니다만,
선생님과 40여 년을 격하여 연락이 닿았지 뭡니까. 삶의 숨은 뜻이란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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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11:3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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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모 (121.XXX.XXX.16)

시골학교의 초딩때 담임 선생님이 생각나는군요. 지금은 많이 쇠잔하실 연세이지만 기억에 남은 모습은 저보다 젊은 모습이고 얼굴입니다
아마도 당시 나이가 20대후반에서 30초반이였을 선생님들 이였을거예요
별명도 많이 만들어 불렀는데...
총각선생께서 시집안간 예쁜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하면 그선생님은 바로 그다음날부터 빽쟁이라는 뜻도 모르는 별명으로 불리곤하였죠.푸세식 화장실에 여선생이 들어간걸 보고 똥펄수있도록 판자를 덮어놓은곳에다 큰돌맹이를 던져 볼일보는데 똥물 튀기는 고약한 장난을 치는 애들도 심심챦게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 선생님들의 모습이 세월의 흐름속에서도 뚜렷하게 기억되네요.

항상 좋은글로 메마른 감정을 치유받고 있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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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10: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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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park (108.XXX.XXX.110)

담임을 맡지 않으려는 현실은 실제 상황입니다. 담임을 기피하려는 교사들에게 맡으라는 호소를 한들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강제수단을 쓰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기간제 교사나 전입 온 교사에게 덮어 씌우듯 담임을 맡기는 것은 교육기관에서 할 일이 아닙니다. 초중등의 모든 학교에서 담임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검토할 때가 되었습니다. 학생지도 진학지도 기타 등등 교실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는 담임 대신 그에 관한 전담(전문) 교사를 두면 됩니다. 추가 인력이 거의 필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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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09: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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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121.XXX.XXX.16)

정말 그렇게 하면 될까요? 교육당국이 깊이 연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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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10: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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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park (108.XXX.XXX.110)

어떤 학생들은 유능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담임을 만나게 되면 참으로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반면 교육자답지 못한 담임을 만나면 인생이 잘 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복권 당첨되듯이 운 좋으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운이 나쁘면 지겨운 1년을 보내야 하는 현실로 몰아서는 않됩니다. 학생들을 위(교사)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횡으로 즉, 수학의 학업에 관한 것은 자신이 가르치는 모든 학생들을 상대로 수학교사가 국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횡적으로 학생들을 이끄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문제학생도 횡적으로 지도하면 됩니다. 현재 교육당국이 그런 것을 연구할 능력이나 의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왜정시대의 교육제도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었을리가 없겠지요. 지면이 모자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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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15: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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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ypen (211.XXX.XXX.73)

나는 국민학교 내내 '시늉'으로 알았죠. 선생님한테서 칭찬을 받으면 친구들은 '시늉받았다'며 놀려댔죠. 그것이 '신용'이라는 것을 안 것은 졸업 한참 뒤의 일이었고요. 신용이 돈거래의 용어가 돼버린 지금의 세상이 삭막해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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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09: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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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121.XXX.XXX.16)

그런데 전북 경북 이런 곳 사람들은 그 말을 쓴 적이 없다고 하네요. 충청도에서만 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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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1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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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39.XXX.XXX.180)

세상엔 당연히 변해야(발전)하는 것도 많지만 변해선 안될 가치도 참 많습니다.
그 중애서도 사제지간의 신뢰와 예의를 생각합니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사제지간의 폭력 장면을 뉴스로 접할 때 가슴이 아픕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 스승에 대한 존경과 예절을 함께 가르쳤으면 합니다.
신학기가 되어 새삼 초등학교 교정에서 느끼는 애틋한 마음은 제가 1학년 때 한 반 남자아이가 제 필통을 빼앗아 도망치는 것을 5 학년이던 "떼부짱"이란 별명을 가졌던 언니가 턱을 잔뜩 치켜세운 채 쫒아가던 장면입니다.
운동장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반 세기만에 그 남자아이의 소식을 접했는데 지금은 알콜중독 치료시설에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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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1 14: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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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121.XXX.XXX.16)

떼부짱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저는 흔히 떼보짝이라고 말했는데요. 그것도 연구 대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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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10: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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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길순 (121.XXX.XXX.16)

별 것 다 기억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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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1 08: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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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114.XXX.XXX.98)

30여 년 저쪽의 일입니다.
전라도 광양의 옥룡중학교에 부임하여 1학년 3반 담임을 맡았습니다.
교사라곤 허허벌판인 논 가운데에 2층 콘크리트 건물 한 채가 달랑이었고, 아이들은 토끼 발 맞추는 산골마을에 사는 터라 매일 이십 리 이상을 걷거나 콩나물시루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했습니다. 한데 그 아이들로부터 시도때도없이 거둬들여야 하는 육성회비며 수업료, 이런 것들로부터 담임은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성가신 일 때문에 담임은 무조건 사양한 채 길지 않은 교직생활을 접고 말았는데 (당시에는 교권침해도 담임기피도 흔치 않았습니다) 주필님의 글을 읽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지만(양적인 팽창) 사람 사이의 일들은 반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듯싶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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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1 07: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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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121.XXX.XXX.16)

한 선생님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이 불행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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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1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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