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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진
유능화 2013년 03월 21일 (목) 00:05:30
제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올해로 어언 39년입니다. 달리 말하면 의사면허 취득을 한 지 39년입니다. 대학에 근무하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정년퇴임을 하거나 곧 할 예정입니다. 의사 생활을 마무리할 시점이기도 한 요즈음에 나는 멀지 않은 곳으로 왕진을 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급한 환자의 경우 응급실로 보내지 절대로 왕진을 하지 않습니다. 시대상황이 의사로 하여금 왕진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송 할아버지는 제가 언젠가 한 번 언급했던 분입니다. 매일 2시간 정도 할머니를 주무르고, 구청에서 행하는 공공근로를 통하여 약간의 수입이 있으면 대단히 고마워하시는 소박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허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하니까 집안이 마비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마사지를 못 받으니 날이 갈수록 고통이 더 하고 가족들의 일상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저의 첫 왕진 경험은 1976년 수련의 시절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병원 수련 중에 6개월 간 무의촌 지역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전라북도 진안에서 무의촌 근무를 했는데 어느 날 하루는 임산부가 진통이 온다고 해서 헐레벌떡 가서 분만을 돕게 되었습니다. 아기 출산 후 태반을 꺼내려고 손을 자궁 속으로 넣으려고 하니까 임산부가 손을 빼라는 것 이었습니다.

내가 의아해하며 손을 빼고 있으려니까 임산부가 용변을 보는 자세로 앉아서 아랫배에 힘을 주니 태반이 쑥 빠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 분만 방법이 현대 병원식 분만보다도 월등한 것을 경험했고 그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첫 왕진이자 마지막이 될 뻔했던 왕진이었습니다.

37년의 세월이 흐른 요즈음 왕진은 나의 의사 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진 영역인 줄 알았는데 송 할아버지가 119 구급차를 불러서라도 제 병원에 오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큰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해도 부득부득 제 병원으로 오시겠다기에 할 수 없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왕진을 갔습니다. 허름한 빌라에 사시는 할아버지는 허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하고, 둔부에는 욕창도 생기고 체중이 완연히 준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용변을 보는 게 너무 어렵다면서 울며 하소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용변을 보느라고 한 시간 동안 씨름하는데 나오는 양은 애기 주먹 만큼밖에 안 된답니다. 더 괴로운 것은 계속 변의를 느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척추 협착증으로 고생하시던 할아버지에게 3주에 걸쳐 척추 후지신경 차단술(Posterior dorsal nerve block)을 시행하고 좋은 링거를 주사하니 통증도 많이 경감되고 회복 속도가 빨라 요즘에는 휠체어도 안 타고 집안에서 걸어 다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환자 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좋아하고 저 또한 기분이 좋습니다.

나이가 들면 배우자 중에 누군가 먼저 아플 테고, 아니면 둘 다 아플 수가 있을 텐데, 송 할아버지를 통하여 배우자가 동시에 아프면 집안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냉대와 구박에 더 마음이 아프다고 하시는 송 할아버지를 통하여 나의 미래는 어떨까 하는 상념에 빠졌습니다.

오랜만의 왕진으로 의사 본연의 임무와 기쁨을 동시에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자식들의 구박으로 인한 노부모의 아픔과 슬픔을 느꼈으니 기쁨과 슬픔의 교집합입니다. 송 할아버지가 제발 더 건강해지고 자식들로 인한 마음의 상처도 빨리 아물었으면 합니다.

경복고, 연세의대 졸업. 미국 보스톤 의대에서 유전학을 연구했다. 순천향의대 조교수, 연세의대 외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서 연세필 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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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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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리 (24.XXX.XXX.229)
건강을 잃는다는 것처럼 노인에게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요즘 척추와 엉덩잉 꼬리뼈에 이상이 와서 걷지를 못하고 누워 있었더니 희망을 잃는 것
같았습니다. 움직일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란 걸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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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08: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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