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바꾸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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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바꾸는 세상

방석순

2006년 10월 25일 (수) 00:00:00

한동안 사람들은 미디어가 세상을 바꾸어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미디어가 바꾸는 세상’은 벌써 세대 전 이야기가 돼버렸습니다. 지금은 ‘정보통신 기술이 바꾸는 세상’입니다.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 미디어를 바꾸고, 그렇게 해서 바뀐 미디어가 또다시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온 세상 소식을 문자와 박제 그림으로만 전하던 신문과 잡지, 소리로만 전하던 라디오를 제치고 눈부신 영상과 음향으로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TV는 수십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력을 발휘해왔습니다. TV로 인해 동서의 양속이 같아지고 남북의 문화가 닮아가 마침내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정치학자들은 1960년 케네디와 닉슨의 TV 대토론이 정치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고 평합니다. 케네디는 미국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정치가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그의 대통령선거 승리는 TV라는 미디어를 이용할 줄 아는 선거전략 덕분이었다는 분석입니다.
적자 덩어리의 올림픽을 황금알 낳는 거위로 바꾸어 세계 각국 재상들을 대회 유치의 세일즈맨으로 나서게 한 것도 TV의 위력이었습니다. 종합점수로만 따지던 양궁의 룰을 바꿔 녹다운 경기로 만든 것도, 유도에 순백색 도복을 칼라 경기복으로 갈아입힌 것도 TV였습니다. 미디어, 특히 TV는 전 세계의 변화와 발전의 강력한 추진력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매스 미디어의 총아로만 여겨지던 TV조차 기술의 진화에 밀려 어느덧 변화를 강요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쇼나 드라마, 스포츠 중계까지도 PC나 휴대전화, 또는 그와 비슷한 개인 단말기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겨울철 화로를 둘러싸듯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던 시대는 지나간 것입니다.

한때 미국은 물론 세계의 정보시장을 쥐고 흔들던 NBC 유니버설이 그러한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여 지난주 유례없이 대대적인 개혁을 선언했습니다. ‘NBC 2.0’이라고 명명된 플랜에 따라 700명을 감원하고 2008년까지 전체 예산 가운데 7억 5천만 달러를 삭감하기로 했습니다. 드라마, 코미디 등 특히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프로그램들은 대대적인 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이제껏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청률과 수익률을 자랑해왔지만, TV도 마침내 이미 수난을 겪고 있는 신문, 잡지, 라디오 등 다른 전통적인 미디어들과 마찬가지로 정보통신의 신기술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들의 거센 도전을 피할 길 없게 됐다는 것을 천하의 NBC가 인정한 것입니다.

NBC가 추구하는 사업방향은 뉴스를 포함한 모든 방송 콘텐츠의 인터넷과 모바일 장치를 통한 디지털 송출입니다. 구시대의 채널, 구시대의 비효율 과다경비의 공룡 조직으로는 케이블 TV에 이어 등장한 인터넷, 개인휴대 모바일통신 등 확산일로에 있는 미디어의 분화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NBC의 라이벌 CBS나 ABC도 손놓고 있는 게 아닙니다. 두 회사 모두 성장속도가 떨어진 라디오 방송을 정리하면서 인터넷과 이동송출 분야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유력 일간지인 뉴욕 타임스와 시사 주간지 타임도 소유한 라디오를 처분하고 인쇄 분야의 일자리를 줄이며 온라인 서비스를 강화하고 나섰습니다.

새로운 환경의 정보시장에서 신문이건 방송이건 위기에 몰린 미국의 전통적 미디어들은 앞으로 살 길이 온라인 서비스의 강화, 멀티미디어로의 지향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온라인으로 얻는 수익이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성장과 발전의 길은 그곳에 있다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세계 정보유통시장을 주도하는 고품질 콘텐츠와 탄탄한 재정기반을 갖춘 미디어의 존재는 한 나라의 큰 자산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미디어를 갖지 못한 나라에서는 남의 눈과 귀에 의존, 자칫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를 얻기 십상인 까닭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사회발전에 기여해온 전통적인 미디어들, 특히 인쇄 미디어들이 지금 생사기로를 헤매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때 재정적으로 된서리를 맞은 데다 설상가상 신기술로 무장한 후발 미디어들의 도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형국입니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수백억원의 빚더미 위에 앉아 사실상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딱한 일은 그러한 미디어의 경영진이나 종사자들조차 옛 영화에 취해 자신들의 심각한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의 접목으로 살 길을 찾기에도 바쁜데 경영적자는 아랑곳없이 임금 인상, 보너스 요구로 파업을 일삼는 노조도 없지 않고, 빚잔치하며 자신들의 체면치레에만 열을 올리는 파렴치한 경영진도 없지 않습니다.

정부는 균형있는 정보유통을 위해서라며 국민의 세금을 쥐어짜내 사업지원이다, 공동배달 후원이다, 회생 불투명한 구시대 미디어에 영양제를 투여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경쟁력을 갖춘 선두그룹에 대해서는 시장점유율 상한선을 긋고, 복합 미디어로의 전진을 막는 등 편의적인 가름대로 이리저리 갈라 통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시장원리를 왜곡하는 일입니다.

정보통신 기술로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나라에서 신기술을 응용해 건강한 미디어를 육성하고 건전한 정보시장의 룰을 만드는 반듯한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눈부시게 달려가는 해외 미디어들과의 경쟁을 가로막고 사회 발전의 추진력에 무거운 닻을 달아 가라앉히려는지, 정치논리만 무성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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