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신아연 공감
     
한산도 제승당 나비 구조 사건
신아연 2013년 08월 26일 (월) 01:33:05
한국에 머물며 지난주 통영을 거쳐 한산도 제승당을 찾았습니다.

8월의 한낮, 폭염 속 제승당 활터 주변은 적막감이 지나쳐 낮은 긴장감마저 일으켰습니다.

어쩌면 무심코 올려다 본 단청 모서리에 작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파닥이고 있었던 것이 긴장감의 실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위가 워낙 고즈넉했기에 처절한 날갯짓과 더불어 공포로 할딱이는 나비의 심장소리조차 들릴듯 했지만 끈적이는 거미줄에서 벗어나려 뒤챌수록 다만 옥죄어들 뿐, 자기 몸부림에 지레 사색이 될 지경입니다. 살고자 하는 작은 나비의 본능적 몸짓은 미구에 닥칠 죽음 앞에서야 끝이 나게 생겼습니다. 거미는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며 한 번씩 줄을 당기듯 제 줄에서 우쭐우쭐 탄력을 받습니다.

그 상황에서 동행과 저는 진지해졌습니다. 저걸 어쩔 것인가. 나비를 살려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둘 것인가. 나비를 살리자니 거미가 울고, 거미를 좋게 하자니 나비가 죽게 생겼기에 말입니다.

하찮은 미물간의 일이라고 장난 삼아 한 말만은 아닙니다. 거미의 '줄'이나 나비의 '날갯짓'은 둘의 생존이 걸린 실존적 상황이라는 것과, 먹고 먹히는 사슬에 대한 엄연한 질서를 인정했기에 시작된 갈등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비에 대한 연민의 감정과 거미에 대한 염오감을 배제한 채 저 둘 사이에 개입해얄지 말지를, 개입하게 된다면 우리 자신에게 어떤 당위성을 부여할지를 잠시 고민했습니다.

동행은 마침 긴 우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여름 소나기에 대비한 것이었지만 하늘은 짱짱하기만 해 이따금 양산인 양 펼치기는 했어도 실상은 거추장스러워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나비를 살려주자’는 쪽으로 정황이 몰리기 시작한 결정적 동기가 우산에 있었으니, “살려주고 싶어도 팔 길이로는 단청에 닿을 수 없으니 장대같이 긴 이 우산이 없었다면 생각뿐이지 않았겠냐”는 게 동행이 지적한 포인트였으니까요.

굳이 가져올 필요가 없었던 우산에 이르기까지 상황을 되짚어, 하필 나비와 거미의 숨막히는 숙명적 구도에 우리의 눈길이 간 것, 제승당 ‘저 정자’가 아닌, ‘이 정자’에 발길이 닿은 것, 타이밍 맞추어 그 시간에 통영에서 배를 타고 한산도로 들어온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이번만은 나비를 살려야 한다는 자연스런, 그러나 필연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행이 우산을 치켜들고 나비 날개에 엉킨 거미줄을 훌쩍 걷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자유의 몸이 되어 가뿐히 날아갑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머리 맞댄 또다른 ‘피조물’의 존재를 알 턱이 없을 테니 거미줄에 걸려든 것도, 일촉즉발 목숨을 건진 것도 제 알 바 아닐 것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들도 순간순간 더 높은 존재의 자비로운 손길, 측은지심에 깃대어 지금까지 생명을 부지하고 있건만, 막 살아 날아간 저 나비처럼 그 존재를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우리를 만남으로써 기적을 체험한 나비처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누군가가 베푼 기적의 산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유는 나비에게 치우친 것이니 배를 곯게 된 거미로서는 억울한 일이자 우리로선 미안한 일이겠지요.

그래서 그보다는 반칠환의 시 <먹은 죄>를 떠올려 보는 것이 상황에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다 그 ‘먹은 죄’ 때문에 우리 모두는 서로 정죄할 수도, 서로 용서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먹은 죄’라고 할 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다만 살려고 그리 했을 뿐이라면 그게 무슨 죄겠습니까. 부정하고 부인하고 모함하고 변덕부리고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안면 몰수하고 뒤통수 치고, 용렬하고 비겁한들 다 자기 살려고 한 짓인데 그게 무슨 죄가 되겠냔 말입니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그저 인간사일 뿐일 테니까요.

<먹은 죄>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3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김윤옥 (39.XXX.XXX.180)
황망중에 나비, 아무런 인사도 없이 떠났지만
두고 두고 두 분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입니다.
호주로 돌아가시더라도
무더운 여름, 바람 한 줄기 만나시거든
그 때 그 나비의 날갯짓을 기억해 주십시요.
답변달기
2013-09-01 21:28:44
0 0
인내천 (183.XXX.XXX.179)
생명은 모든 생명의 희생만으로 유지된다고 했죠?
우리 인간이 호흡하고 살아있기 위해선 먹어야합니다.
밥을 위해, 내년 봄 씻나락으로 선택되어 들녘에서 당당히 자랄 희망에 부푼 벼를 인정사정 없이 껍질을 벗기고 살을 깎는 도정작업을 거쳐 펄펄 끓는 물에 삶아버립니다!
김치를 위해,내년 봄 꽃대를 올려 많은 자손을 퍼뜨리려는 폭든 배추를 단두대에 올려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지방질 섭취를 위해 살진 돼지를 동료들 틈에서 격리시켜 짐짝처럼 싣고가 느닷없는 쇠망치 세레를.. ....
균형있는 식단을 위해 오대양 육대주를 맘껏 누빌 조기를 촘촘한 그물로 잡아올려 바닷물보다 짠 소금에 저려 십자가형보다 고통스럽게 대롱대롱 매달아 말려버립니다!
분명히 생명은 끝없는 생명의 희생으로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뭍 피조물의 생명을 앗아간 우리가 죽어서라도 나무들의 거름이 되어주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도리일진대 그마저도 싫어 화장해버린다면 피조물들의 실망이 여간 크겠죠?
당연한 먹이사슬의 규범을 정점인 인간이 깨버린다면.....
답변달기
2013-08-26 23:34:49
0 0
김창식 (218.XXX.XXX.165)
Song for Liberty! 사유 깊은 좋은 글입니다. 더 높은 존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요.ㅎㅎ
답변달기
2013-08-26 16:27:16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