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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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뿌리

김영환

2013년 09월 13일 (금) 00:49:54

갈 일이 거의 없는 서울 강남 거리를 어쩌다 걷다 보면 고압적인 건물의 높이에 주눅부터 듭니다. 사람이 건물의 부속이라는 느낌이죠. 겨울에는 찬바람 속 햇볕이 들지 않는 북향 길의 음산함이 더해집니다. 과거 외국에서 18층에 살았던 시절은 늘 공중에 떠서 착륙을 그리워하는 비행기 신세처럼 불안했는데 이후 고층의 비인간성을 더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토지이용의 극대화를 위해 치솟는 부와 물질문명이 얼마나 고단한지는 호텔 숙박료를 생각나게 하는 코엑스의 살인적인 주차료를 내면서 실감했습니다. 인간보다 차를 중시하는 역설이라고나 해야할지, 일산 킨텍스와는 너무나 달랐죠.

강남에는 부가 첩첩산중이지만 강북이 자부심을 갖는 역사의 퍼레이드는 없습니다. 성종을 모신 선릉이 유일한 ‘강남스타일’일까,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궁궐과 조상의 얼이 배어나는 한옥의 숨결은 못 찾습니다. 강북은 궁궐만이 아니라 주변 길이 역사이고 보니 외국의 관광객들이 '아파트 공화국'의 오명처럼 가려진 빌딩 숲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아 밀려듭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풍문여고 교문을 지나 옛 경기고가 있던 정독도서관으로 오르는 길, 혹은 안국동우체국의 왼쪽 길로 들어서 윤보선 가를 지나면 역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길이 이어집니다. 걷노라면 중국인과 일본인 기타 외국인 관광객의 말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왜 북촌인가요. ‘고궁과 역사가 어울리며 한국인의 대표적인 주거공간에서 삶을 이어간 뿌리가 있다. 그곳이 리얼 서울, 리얼 코리아다’라고 소문났기 때문일 겁니다. 일본 관광객의 팸플릿에 필견(必見)의 장소로 소개되는 ‘북촌8경’은 원서동의 공방 길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전통 한옥이 밀집한 가회동에 있습니다.

가끔 결혼 전 전셋집을 찾으려고 가회동 언덕길을 배회했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형편에 맞지 않아 멀리 광명 변방에 신접살림을 차렸습니다. 10여 년 전에는 아파트를 팔고 한옥을 살까 하여 꽤 발품을 팔았지만 능력부족이었습니다. 개인이 부를 가지면 족보를 찾는 것처럼 사회 전체에 부가 축적되면서 “우리 것”을 찾는 추세가 번지나 봅니다. 그때 집을 보러 들어가 보기도 했던 정다운 한옥들이 겉은 그대로인데 내부는 더러 공방이나, 카페, 디자인 회사, 작은 식당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당시 한옥의 내부를 보면 미음자 구조에 나무가 한 그루 자라는 중정이 있었고 싱크대를 놓은 대청에 입식 주방이 보였습니다. 니스를 바른 대들보와 대청마루의 밝은 빛깔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참 잘 어울렸죠.

전에는 몇몇 식당을 빼면 상점이 거의 없었던 삼청공원으로 가는 길은 이제 화장품, 빈티지 옷, 핸드백, 카페, 커피 숍, 레스토랑, 꽃집, 편의점으로 줄을 잇고 있어 한유하고 고즈넉한 맛은 사라졌습니다. 더 높은 지대를 추구하기 위해 자본의 물결이 달려드는 풍경입니다. 물론 자수와 매듭, 궁중음식 등을 연구하는 전통 민속박물관도 늘어났습니다. 북촌의 세(勢)는 삼청공원까지 뻗어났죠,

이런 분위기에서 소위 ‘서촌’이 2010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습니다. 한옥은 북촌에 900채, 서촌에 688채가 있다는데 '서촌'은 1910년 이후에 지은 개량한옥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서촌’에 갔습니다. 골목 골목에 카페와 레스토랑, 미술관, 커피 숍이 즐비했습니다. ‘리틀 북촌’이라고나 할까요? 북촌에 벼슬아치가 많이 살았다면 '서촌'은 역관, 의원 등 전문직 중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영화배우 수지가 사람이 살지 않는 한옥에 들어가 몰래 화초를 가꾸며 마루에 물걸레질을 하던 ‘건축학개론’의 한옥도 ‘서촌’ 누하동에 있습니다.

최근 종로구는 지명위원회의 의결로 ‘서촌’이라는 지명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진짜 서촌은 서소문 혹은 정동 일대이고 지금 '서촌'이라고 부르는 효자동 등 15개 동 일대는 역사성을 따져서 세종의 탄생지인 ‘세종마을’이나 물이 흘러오는 곳을 뜻하는‘상촌(上村)’으로 불러야한다는 것입니다.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고 '서촌'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일부 주민과 상인들이 2010년 경부터 편의상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인왕산과 경복궁의 서쪽 사이를 '서촌'이라고 불렀는지 의아해 하죠. 필자도 수십 년간 경복궁 동쪽에서 근무했지만 '서촌'이라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북촌이 있으니 '서촌'이 어떠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럼 '서촌'의 반대쪽에 있는 북촌은 동촌으로 불러야 하냐는 반박도 나옵니다. '서촌'은 단어가 짧아서 관광객들이 쉽게 인식하겠지만 지명위원회의 지적처럼 쇠락과 경박의 이미지가 보입니다. 일본의 ‘니시무라(西村)’라는 이름도 연상시키죠. 일제가 멋대로 갖다 붙인 남대문을 숭례문으로, 동대문을 흥인지문으로 되찾은 것처럼 '서촌'도 고유한 이름을 되찾아야 합니다.

사실 동쪽이건 서쪽이건 경복궁 일대가 이만큼이라도 ‘슬로시티’다운 전통의 체취를 전해주는 것은 전체를 국보 1호로 지정해야 마땅하다고 필자가 생각하는 43만 평방미터의 경복궁이라는 초대형 문화재와 청와대라는 중추 기관이 있어 개발이 제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발보다는 보존, 상업주의보다는 역사를 존중하는 것이 긴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이자 서촌주거공간연구회 회장인 로버트 파우저 씨는 ‘나는 왜 서촌을 사랑하는가’에서 “한옥, 양옥, 일식 가옥이 뒤섞인 서촌은 근대 한국 주거건축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면서 “역사의 여러 층(層)에서 레트로(retro) 분위기가 나온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이 옛 한옥을 찾아 들어오고 있고 곳곳에 갤러리와 카페가 생기고 있다. 온갖 연대가 섞여 있는 풍경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다 보면 한순간이라도 바쁜 일상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찬양했습니다.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로 부터 윤동주, 이상, 현진건, 노천명, 이중섭, 이상범, 박노수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역사가 살아 숨쉬는 터전에 올바른 지명을 찾아야 합니다. 이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어 역사와 문화를 접목하는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져서 한국적인 공간으로 확산할 것을 기대해봅니다.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