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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0)월(月)애(愛)
신아연 2013년 10월 01일 (화) 01:00:42
10월입니다. 그것도 1일입니다. 고열, 미열, 신열 할 것 없이 지난 여름의 열이란 열은 죄다 내린, 말갛고 보송한 얼굴로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더워 죽겠다 할 땐 언제고 아침저녁으론 같은 입에서 춥단 소리가 나오니 이럴 때 잘 쓰는 상투적인 말, ‘인간이 참 간사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릴케의 시구처럼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고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시간 지났다고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위대는커녕 지난 여름은 치졸하고 옹졸했습니다. 지독하고 인색했습니다. 사람이 간사한 게 아니라 실은 여름이 너무한 거였습니다.

지난 여름을 떠올릴 때면 마치 고문에서 놓여난 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는 가엾은 영혼들의 그것처럼 지금도 고통스럽습니다. 호주 이민 21년 이래 여름철의 모국 방문은 처음인 데다 심란한 개인사까지 겹쳐 이중 짓눌림을 당한 저로서는 더욱이나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시름겨움이었습니다. 엄살이 아닙니다.

그러나 옛말하고 살 때가 온다는 말은 계절에도 적용되나 봅니다. 그 지겹던 더위가 어느새 물러가고 이렇게 아깝도록 상쾌한 날을 맞고 있으니 말입니다. 꼭 거짓말 같습니다.

마치 사지(死地)를 뚫고 나온 전사(戰士)들마냥 연일 높고 푸른 초가을 하늘 아래 폭염을 이긴 자들의 승전보가 나부낍니다. 계절을 만끽하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가을 바람에 상큼하니 나부대는 젊은 여성들의 긴 머리는 청초합니다.

예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8월의 어느 날, 우연히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교환 학생으로 왔다는 두 인도네시아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영어로 말문을 여는 제가 오히려 무색하게 두 학생의 우리말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야기 끝에 둘은 합창을 하듯 한국은 사계절의 나라라서 남은 한국 생활이 기대된다고 했습니다.

일년 내 끈적이며 더운 자기네 나라에서야 이 정도 더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고 한국 체류의 큰 의미는 사계를 골고루 즐기고 음미하는 것에 있다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나라, 한국’, 아마도 인도네시아에서 그렇게 배웠나 봅니다.

그러나 저는 곧 자신 없고 시무룩해졌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그래, 한국의 멋지고 찬란한 사계를 기대해도 좋아. 일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야.” 라고 맞장구쳐 주질 못했습니다.

우울하고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가 사계절을 잃은 지는 실상 꽤 되지 않습니까. 시나브로 우리나라는 여름과 겨울만 있는 ‘두 계절의 나라’가 되어 짧아진 봄, 가을은 그저 두 극단을 잇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찰나에 머물 듯 애절함과 아쉬움을 남긴 채 우리 곁에서 곧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말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웃고 있지만 여리고 순정한 누이동생, 헌헌장부, 후리후리한 이웃의 ‘훈남’을 잃는 허전함이 곧 밀려들 것이기에 말입니다.

떠날 것이 예고된 애인이라 해도 이렇게 감질나지는 않을진대 변심한 애인이라도 된다면 갈 때 가더라도 한번 매달려 볼 수는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계절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자' 운운할 일도 아닙니다. 계절이 우리를 속인 게 아니라 우리가 계절을 속인 것이니까요. 우리 모두는 봄과 가을을 질식시킨 공범입니다.

마구, 함부로 먹고 쓰고 내뿜고 버리고 묻고 파내고 베어내고 뽑아내고 하는 사이에 지구가 병들고 자연이 제 방식으로 순환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우리 탓입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을 여간 못살게 굴지 않았다는 뒤늦은 후회, 그러고도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비겁하게 외면했던 결과가 '봄 가을 실종'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범인은 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더니 그래 놓고는 우리끼리 수군거립니다. “언제부턴가 봄, 가을이 없어졌어. 이제 곧 추워질 테지. 올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까, 눈도 많이 오겠지? 걱정이네.” 더위가 꺾이던 9월 내내 몇 번이나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겨우 여름내 흘린 이맛전의 땀을 훔쳤건만 벌써 추워질 걱정으로 그나마 짧은 가을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할 모양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으니 계절을 망쳐 놓았지만 그래도 우리끼리는 서로 위무해야 할까요?

지난 9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여름에 만났던 인도네시아 여학생들이 자꾸 생각납니다. 자기네 나라에는 없는 계절, 한국의 가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좋아하고 있을까, 10월은 또 어떤 마음으로 맞고 있을까, 그네들은 이 정도만 돼도 한국의 사계가 구분되어 느껴질까…

매서운 겨울이 조금이라도 더디 오기를, 이 가을이 조금이라도 더디 떠나기를 벌써부터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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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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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112.XXX.XXX.157)
가을예찬을 통해,시월愛를 읽으면서 지난 여름을보낸 마음의 표현에 마음이 아프군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이 우리의 아픔을 다 치유해 준다면 억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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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4 09:14:49
0 0
조정임 (112.XXX.XXX.157)
오늘 우연히 작가님의 글을보고 지난삶을 생각하며 가슴 뭉클해 졌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마음을 비우는 노력을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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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4 08:58:29
0 0
박병모 (112.XXX.XXX.157)
안녕하세요?신선생님

가을 하면 정해진 남은기간을 위해 돌아보고 정리하고 그럼으로해서 주위가 부산하고 어수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것 처럼 느껴져 전 그저그런 계절로 느껴진답니다.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아 운동하긴 좋아서 가을이 길었으면 하는 바램은 있지만..

봄하고 가을 둘중에 하나 골라가져 하면 저는 봄을 취하겠죠.

그런 봄 가을도 어릴 적 비해 짧게 느껴지는 건 그저 초등학교시절 운동장이 넓고 학교가 컸던 게
지금은 좁고 작게 보이는, 내가 시야가 커져 어른 입장에서 본 크고 작은 것하고는 다른,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자연순환질서를 인간들이 ( 나를포함해서)파괴해놓은 원죄의 결과 일겁니다.

헌데 다행인것은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에 대해 사계가 뚜렸하다고 가르쳤더라도 똑같이 4개월씩이다라고까지 깊게?는 안갈쳤을거라는 스스로 위안가져봅니다.

따라서 그 여학생들이 4계절이 진짜있고 가을은 이런 느낌이구나 만을 알았어도 한국 기후에 대한 로망은 깨지지 않을 거라 믿어요.

가을의 짦음의 아쉬움을 훈남의 떠남의 허전함으로 비유한 게 멋있습니다.(아닐지도 모르지만 전 그런 느낌으로 해석했슴)

항상 좋은글 읽게 해주어 감사드리며 자칼 필진들의 건승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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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9:41:45
0 0
신아연 (112.XXX.XXX.157)
감사합니다, 박병모님. 격려 말씀과 제 글에 대한 자상한 분석(?)과 위로에도 감사드립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학교 운동장, 이후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바라 본 운동장 크기에 대한 느낌을, 제 글에 있는 봄 가을의 길고 짧음의 차이와 대비시켜 생각해 보신 것이 재미있습니다.

박병모님의 말씀처럼 저 역시 그 여학생들이 짧으면 짧은대로, 길면 긴대로 한국의 사계를 나름 느끼고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도 한 차례 다녀왔습니다만 인도네시아는 정말 지루한 열대 기후의 연속이더군요.

선생님 말씀대로 제 글의 훈남은 가을을 의미합니다.흔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니까요. 이제 가을 타는 남자분들의 가슴앓이가 슬슬 시작될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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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9:50:57
0 0
송봉현 (112.XXX.XXX.157)
신 아 연님.

지금 벼가 익어 들판이 활금 물결입니다.

억새는 곳곳에 하얀 머리칼을 나부끼며

한 여름 잘 살고 떠나갈 날을 의연한 자태로

기다립니다. 슬프도록 푸른 하늘을 말간 가슴에

가득가득 채우면서.


그 고운 단풍이 오기 전이라도 이만 하면

우리의 가을은 멋있습니다.

개발로 인한 하늘의 징벌을

입증할만한 명징한 증거로는 미흡하고

아직은 논의할 만한 여백이 있어보입니다.

너무 우려하지 마시고 그렇더라도

매질과 찬미를 계속 하세요.



외국에서 어떻게 버티며 사냐고

이민 가신분들을 보면 경탄스럽습니다.

아름다운 글 항상 감사하며 행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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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9: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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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희 (121.XXX.XXX.44)
글을 참으로 맛나게(?) 쓰셔서 질투남니다.ㅎ ㅎ ㅎ
진짜 지난 여름은 너무했지요.
방안의 습기로 부부 싸움 비슷한 감정으로 부딪친게 몇번......
지구의 온난화로 부부의 사이도 험악해질 뻔.
아 글쎄 거풍시키면 또 습기가 배어들고 배어들고 졸지에 짜증을 유발시키더군요.자연의 복수전이 더 닦아 오기전에 자성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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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2:05:21
0 0
신아연 (112.XXX.XXX.157)
칭찬해 주시고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름 습기로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사실 햇볕 보다는 습도가 사람 미치게 만들지요.^^ 저도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부부끼리 싸웠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남하고 그랬다면 결과가 감당이 안 되지 않았겠습니까. 건드리기만 하면 아무하고라도 싸움이 일 것처럼 날씨가 워낙 험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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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19:33:05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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