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시스템을 비판하는 검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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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시스템을 비판하는 검은 그림자

이성낙

2013년 10월 03일 (목) 01:36:25

우리나라에서 역사적 의료보험(건강보험) 시대의 첫 문이 열린 것은 1977년입니다. 당시 야당이나 시민 단체는 이구동성으로 국내 GNP가 1만 달러도 못 되는 경제 여건상 너무 이르다며 결사반대한다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130여 년 전인 1880년대 독일에서 당시 프러시아(Prussia/英, Preussen/獨)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 총리가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야당인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크게 반대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습니까. 그러나 만일 지금 우리에게 건강보험 제도가 없었다면 어떨까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합니다.

근래 각종 대중매체와 시민 단체가 앞장서서 “대형 병원에 입원하기 힘들다, 6인실에 입원할 환자가 울며 겨자 먹기로 1인실이나 2인실 병실에 입원해야 한다, 일반 병동에서는 환자 가족이 간병인인가, 1~2인 특실을 없애고 일반 병실을 늘려야 한다, 교수 특진 제도를 없애라” 등의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수 언론 매체에서조차도 같은 맥락의 기사를 동조하듯 큰 비판 없이 내보내고 있습니다. 아주 먼 사회 체제에서나 들을 법한 구호가 떠올라 오싹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왜 비행기 좌석에 1~2등석이, 왜 KTX에 우등석이, 왜 고속버스에 우등 버스가, 왜 호텔에 등급이 있느냐고 외치는 또 다른 색깔의 ‘검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서입니다. 마치 다른 이념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입원실 문제를 예로 들어보면, 1960년대 유럽에서는 대학 병원에 6인 병실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식 병원에서는 3인실, 2인실 그리고 1인실 병실만 있는 병원으로 ‘변모’했습니다. 아울러 신축 병원에서는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3인용 병실 이상은 사라졌습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6인실이란 공간에서는 각 환자의 사생활이 침해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인권 차원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뒷걸음치며 다른 관점에서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역시 인권에 대한 의식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인 병실의 증설보다는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좀 더 보장되는 병실환경이 필요하고, 이에 따른 비용의 부담을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것이 아니라 보험제도나 국가에서 책임지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의 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 대형 병원의 병상 가동률은 종종 100%에 근접합니다. 부인 전용 병실에 남성 환자가 입원할 수 없고, 어린이 병동에 어른이 입원할 수 없고, 특수 병동에 일반 환자가 입원할 수 없다고 치면 이는 실제 병상 가동률이 약 120%에 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입원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 현실입니다. 국내 병원의 입원에 따른 수가는 100% 병상 가동률을 염두에 두고 산정한 것입니다. 반면 선진국 대형 병원의 병상 가동률은 약 70%를 산정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왜곡 현상이 일어납니다. 병원 경영 책임자는 일반 병동에서의 ‘손실’을 특실 운영으로 보전하려는 ‘꼼수 경영’에 유혹당하게 마련입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분명 그런 측면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필자가 신축 대형 병원 행정에 관여하던 1994년의 일입니다. 병원의 한 개 병동(약 45개 병상)을 ‘보호자 없는 병동’으로 운영하기 위해 간호 인력을 일반 병동보다 약 2.5배 많게 배치 운영하기로 하고(선진국의 대형 병원 병동에 투입되는 간호 인력 수는 우리의 약 3배 이상) 그에 상응하는 입원 수가를 뒷받침해달라고 정부 해당 부서에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두로 돌아온 답변은 “위화감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핵가족화에 따른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것입니다.

또한 대학 병원 규모의 대형 병원에서 특진 제도 없는 나라가 있을까요. 아마 자유 경제를 추구하는 국가라면 특진 제도가 어떤 형태로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들 대학 병원에서의 특진 제도를 없애자고 합니다. 제도에 문제가 있으면 개선책을 찾아야 하겠지요. 모든 국민은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실제 그것을 찾아 여러 병원을 다니기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를 단순히 경제적 논리로만 해석하여 비싼 특진비를 내는 제도를 무효화하자고 주장하는 데는 또 다른 이념의 냄새가 스며있는 것이 아닌 가, 우리가 경계해서 살펴볼 일입니다.

1950년대 어느 해 늦가을 환절기의 이야기입니다. ‘지리산 호랑이’이라는 별명을 가진 치안국장이 출입 기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요즘 인플루엔자(influenza)가 극성을 부려서 걱정입니다”라는 말을 듣자 금세 정색을 하며 “그럼 당장 잡아넣어야지요” 하고는 부하 과장을 부르려 했답니다. 당시는 ‘인플루엔자’라는 외래어가 생소하던 터라 학식이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호랑이 님’이 인플루엔자를 무슨 범죄 조직 정도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 기관장의 능동적인 자세를 볼 수 있어 왠지 구수한 맛이 느껴지는 당시의 ‘만담(漫談)’ 같은 정감이 생각나는 일화입니다. 하지만 근래 병원 특실 제도나 특진 제도를 없애자는 외침은 ‘검은 개그’처럼 오싹함을 느끼게 할 만큼 걱정이 앞섭니다. 실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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