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안진의 마음결
     
꽃의 흔적
안진의 2013년 10월 04일 (금) 01:22:49
   
  안진의 作, Feeling 1302, 24x33cm, 캔버스에 혼합재료, 2013  
올여름은 긴 슬럼프였습니다. 작가에게 슬럼프란 고독한 독백의 시간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위안으로 삼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긴 여름을 보냈습니다.

빈둥대며 허비하는 시간이 아쉽지만 그래도 그간의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이라며, 잠시 저를 놓아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붓도 들기 싫었던 어느 날, 투정을 부리듯 자연보고 그려 달라며 오대산 자락 풀숲 위에 캔버스를 뉘어 놓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첫 개인전을 발표하고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 반대로 진행되고, 낯선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을 찾아주려는 시도라지만, 미사여구를 떠나 제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숨을 쉬듯이 그저 평범과 비범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상이었습니다.

물론 새로운 창작에 대한 열망만큼 고뇌로 지새우던 불멸 같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우연이 필연이 되는 순간을 만나 들뜨고, 의도보다도 풍요로운 해석에 기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상이 올해 여름은 너무나 오래 낯설었습니다.

자작나무 열매에서 떨어진 씨앗은 앙증맞게도 작은 새의 모습으로 캔버스를 수놓았습니다. 자작나무 껍질은 스스로 제 옷을 벗어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며 자연이 응답해주는 그림을, 볕 좋은 곳에 쪼그려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숲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화려한 색의 꽃무리에서 타들어 가듯 말라붙은 꽃대가 흔들리고, 만개했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비틀어지고 구겨진, 생명을 다한 꽃잎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안에서 내년 봄이면 죽음을 다시 삶으로 바꾸는 생명을 봅니다.

작업대 위에 놓인 흰양귀비, 가는잎향유, 히어리, 까치박달등, 복장나무 마른 잎이 아름답습니다. 캔버스엔 그저 눈길 가는 대로 손길 닿는 대로 그 마른 꽃잎과 꽃대를 올려놓습니다. 간간이 작업을 하는 동안 모처럼 불평 없는 침묵의 시간이 마음 한편에 자리합니다.

그렇게 자연이 주는 터치를 담았습니다. 특별히 의도한 메시지도 없었습니다. 무엇을 그려야만 한다는 의식도 비웠습니다. 거대한 의미구조로 포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굳이 설명을 해야 한다면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라고 해 두겠습니다.

그간 감히 그려낼 수 없었던 자연이 나의 화폭에서 숨을 쉽니다. 자연이 만들어 준 흔적 위에 나의 흔적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여름을 마감한 마른 꽃잎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캔버스 위에서도 나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마른 고사리의 빼곡하고 촘촘한 돌기는 꿈틀대는 새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합니다. 눈이 내리듯 하얗게 덮인 물감 아래 마른 나뭇잎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따스한 노랑과 주홍빛으로 흔들리고 젖으며 피어나는 나와 동행합니다.

자연은 흔적만을 남긴 채 짐짓 뒤로 물러서고 내가 그리는 꽃잎은 자연을 드러내고 싶어 비켜납니다. 어느 것이 마른 꽃잎이고 내가 그린 꽃인지 구별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채 마르지 않은 보랏빛 꽃향유가 아찔하게 코끝을 흔들어 놓습니다.

가을입니다. 고독한 독백의 시간을 오롯이 나의 고통으로 감수하고 거듭난다면 나의 빛깔과 향기가 더욱 짙어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감내가 쉽진 않겠지만 슬럼프가 두렵지만은 않은 것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자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의 긴 슬럼프에 동행을 해준 자연에 고마움을 보냅니다. 곧 하늘과 땅이 노랗고 붉게 흔들릴 것입니다. 기분 좋은 바람과 예쁜 빗방울과 곧 다가올 흰 눈의 풍경이 선합니다. 말없이 나를 위로해주는 마른 꽃의 흔적은 다시 소생하는 희망입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2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정달호 (122.XXX.XXX.80)
꽃 속에 가을을 심고, 겨울, 그리고 봄을 품은,
단편소설 같은 맑고 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는 전시가 가을처럼 많은 열매를 맺기 바랍니다.
답변달기
2013-10-07 17:33:54
0 0
이광복 (14.XXX.XXX.1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답변달기
2013-10-04 13:21:57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