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륜(舵輪)에 꽂히다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정달호 타임 앤 타임

타륜(舵輪)에 꽂히다

정달호

2013년 10월 08일 (화) 00:07:06

제목만 봐서는 마도로스에 얽힌 스토리처럼 보일지 모릅니다만 실은 삶의 행로에 관한 저의 이야기입니다. ‘마도로스’란 말은 화란어 ‘matroos’에서 유래한다는데 젊은 시절 막연하게 마도로스를 꿈꾸어 본 이도 꽤 있을 법합니다. 짙푸른 셔츠에 마도로스 모자를 쓴 바다의 사나이가 파이프까지 물고 있으면 얼마나 근사해 보이겠습니까? 영어로 하면 세일러(sailor), 즉 선원일 뿐인데 이 말이 마력을 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들이 대양을 누비면서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가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저도 알게 모르게 마도로스의 삶을 어렴풋이 동경해보긴 한 모양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굳이 해군장교가 되고자 했던 것도 내륙인 안동에서 어쩌다 외가가 있는 영해에 가서 만나게 된 동해바다를 어린 시절 마음 한구석에 심어 두었었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해군모집시험에서 한 번 낙방하고 난생 처음 재수(再修)까지 해가면서 겨우 장교로 입대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해군에 가서도 전문병과가 아닌 일반 전투장교로 보냈고 그 덕에 작전부서에서 항해사라는 역할도 해보았습니다. 그때 함교(艦橋)를 오르내리며 조타실(操舵室)에서 타륜(舵輪)이란 걸 처음 잡아보았습니다. 요즘 군함은 스티어링휠(steering wheel)보다는 간편한 핸들을 쓰고 있습니다만 제가 탄 배는 다행스럽게도 타륜을 달고 있었지요.

그 무렵 가까운 친구가 미국에서 파이프를 하나 보내왔습니다. 코모이(Comoy)란 고급 브랜드로 생애 최초로 가져보는 것이라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보통 담배는 안 피우면서 순전히 멋으로 물과 뭍을 가리지 않고 이따금 파이프를 피우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진해 제 하숙집 방은 묵향과 토바코 향기가 뒤섞여 온 방에 배어 있었는데 저는 그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어쩌다 부러진 채이지만 그 파이프를, 이후에 사 모은 몇 개의 파이프와 함께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멋을 부릴 요량도 아니어서 이제 파이프는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배를 타고서든 언젠가 바다로 나가게 된다면 다시 파이프를 물고 싶은 생각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한 삼 년을 바다와 함께하고서도, 이후 직업적으로 북해, 홍해, 지중해, 걸프해, 그리고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옮겨가며 세상 이곳저곳에 살면서 어느새 바다가 제 마음속에 들어와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어디서건 항구에 정박된 흰 요트들과 심지어 포구에 묶어 놓은 어선들에까지도 제 마음을 빼앗기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삼십 대 초 노르웨이 시절 어느 선주의 집 벽에 걸어 놓은 타륜을 본 후 바다에 대한 저의 단심(丹心)은 타륜이라는 오브제로 전이(轉移)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세유(Marseille)나 뉴포트(New Port) 같은 해양도시에 가서 거리나 가게에서 간혹 만나게 되는 타륜은 늘 제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요즘 말로 마음이 타륜에 꽂혔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집에 걸어 놓을 타륜을 하나 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게 쉽게 되지가 않았습니다. 폐선이 된 배에서 나오는 것을 구하기는 애당초 어려운 것이고 장식용으로 만들어 파는 것도 대부분 값이 만만치 않아 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타륜이 저절로 제 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아마 타륜으로서는 가장 작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여름 인턴으로 일하던 한 학생이 샌프란시스코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고맙다고 선물을 보내왔는데 'San Fransico' 란 글자가 박힌 타륜 모양의 빨간 열쇠고리였습니다. 이 작고 귀여운 타륜을 제 방 옷장 손잡이에 걸어놓고 매일 제 눈길과 손길을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 전 일본 여행 때 요코하마에 갔던 이야기를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묵은 호텔은 앞뒤로 바다를 내다볼 수 있는 매우 쾌적한 곳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 호텔은 요코하마 선원협회에서 특별히 지은 것으로 가나가와현(縣)으로부터 건축상을 받기도 했답니다. 건물의 구조가 여객선의 선실을 연상케 하는데 바깥 한구석에는 커다란 닻이 하나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근처에는 현대식 고층빌딩들이 바닷가에 모여 있고 그 가운데 취항 종료된 큰 요트 하나가 영구 정박되어 있었습니다. 모처럼 가까이 만난 요트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드디어 진짜 타륜을 만났습니다. 배 생활을 마친 선원들의 향수를 달랠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저처럼 그저 바다를 동경하며 오가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의도였는지, 꽤 큰 타륜이 항구의 건물 유리 벽 안에 보기 좋게 전시돼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작고 예쁜 타륜이 저의 발걸음을 이쪽으로 돌리도록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주에 와 살면서도 오가며 늘 바다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라산 기슭에서부터 해안마을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내려다볼 수 있는 제주의 바다는 섬의 풍광과 어우러져 특별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삽니다. 제가 제주에 오기로 한 것, 또 일하면서 아예 이곳에서 살기로 한 것은 아마도 바다가 주는 마력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청명한 날 망망대해를 바라볼 때면 이 시절에도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제 마음 속의 타륜은 어디론가 뱃머리를 돌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저도 잘 모르는, 타륜만이 아는 그런 곳으로 말입니다.

정달호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이집트 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제주 소재 유엔국제훈련센터(UNITAR)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제주특별자치도의 외국인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외국인거주환경개선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라산 자락에 텃밭과 나무를 가꾸며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묘미를 찾는다.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