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 환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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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 환송회

허영섭

2013년 11월 29일 (금) 02:31:08

며칠 전, 을지로6가 러시아 타운의 사마르칸트라는 음식점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유네스코 중앙아시아학 국제연구소(IICAS=International Institute for Central Asian Studies) 차기 소장으로 부임하는 박필호 변호사를 떠나보내는 환송회였습니다.
그가 근무하게 되는 IICAS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기에 미리 현지 분위기를 느끼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러시아 키릴문자 메뉴판에 벽에는 우즈베키스탄 전통 의상이 걸려 있고 테이블 덮개에도 전통의 덩굴 문양이 그려져 있는 음식점입니다. 무엇보다 부임하는 도시와 똑같은 이름의 음식점에서 환송회를 갖는다는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환송식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참석자라야 주인공인 박 변호사와 모바일웹 개발회사인 GCN의 방세현 대표, 그리고 나까지 포함해 달랑 3명뿐이었으니 그야말로 조촐한 모임이었지요. 식당 자체가 그렇게 넓은 편도 아닙니다. 테이블이 불과 네댓 개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해외에서 오래 생활해 왔고, 이번에 IICAS 소장으로 선임될 때까지도 미국 뉴욕주에서 변호사 활동을 해 왔으므로 서울에는 함께 어울려 지내는 친구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때문이었습니다. 나와는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처음 만난 사이입니다. 내가 현역 신문기자 시절 블루밍턴 캠퍼스에 방문연구원으로 체류하던 1997년 당시 그는 대학원생 신분으로 같은 학교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조촐하긴 했어도 환송식 자리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가 있었습니다. 토마토 야채샐러드에 감자요리, 샤슬릭 양꼬치구이에 이르기까지 주문한 음식들이 모두 맛있었습니다. 양꼬치구이를 한두 번 먹어본 것이 아니었지만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식사를 즐긴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겠습니까. 러시아산 발티카 흑맥주도 식사 분위기를 한층 돋구어 주었습니다.
양파를 곁들인 향신료의 독특한 냄새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새로운 식도락 경험이었습니다. 아마 우즈베키스탄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로 연결되어 있는 중앙아시아 일대의 음식이 대체로 이런 형식일 것입니다. 아무튼, 박 변호사로서는 정식으로 사마르칸트에 부임하기에 앞서 서울 거리에서 사마르칸트를 맛본 셈입니다.

IICAS의 업무 얘기도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올랐습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문화 연구를 통해 일대 국가와 학자들 간의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1995년에 창설된 유네스코 산하 국제연구소라고 하지요. 그 가운데서도 주로 실크로드 문화유산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학술연구와 학술회의의 조직, 학술물의 출판 등이 주요 업무로 되어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는 고고인류학자를 비롯하여 민속학자, 박물관 전문가, 법률가 및 지역 공동체 학술기관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니 그렇게 간단한 업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연구소가 사마르칸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그런 까닭입니다. 지난날 7~8세기 무렵부터 캐러밴들의 실크로드 교역을 통해 동서양의 모든 문화가 녹아 있는 교차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이기도 하지요.
연구소 회원국으로는 한국을 포함하여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중국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터키 등 10개국이 가입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아르메니아 인도 러시아 등 3개국이 잠정 회원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원국마다 일정 부분 활동비를 출연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주로 뉴욕에서 활동하던 그가 어떻게 국제기구인 실크로드연구소 소장으로 선임됐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평소 무형문화재 지식재산권 문제에 관심이 깊었다는 점에서 그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무형문화재 보호를 위한 전문가 양성훈련, 워크숍, 전문가 회의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발표를 했다는 소식을 가끔씩 접하곤 했으니까요.
그러던 차에 지난 10월 경남 진주에서 열린 IICAS 제16차 학술평의회 연례회의에서 제4대 소장에 선출된 것입니다. 타지키스탄의 현직 문화부차관인 아지지 카하르자데 여사가 함께 후보에 올랐으나 우리 외교부와 문화부 차원의 물밑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로써 한국은 국제기구 활동의 범위를 또다시 넓힌 것입니다.

사실은, 박필호 변호사의 경력 자체가 과거 낙타에 의지해 실크로드를 왕래하던 서역 상인들처럼 유랑의 연속이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내가 알기에도 이미 30년 가까이 외국에서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서른 중반부터 시작된 역마살입니다.
한때는 남아프리카의 스와질랜드 주재 부영사로 근무했고, 세계보건기구 행정 담당관으로 필리핀에 주재하기도 했습니다. 나와 처음 만난 인디애나대학 시절에는 학위를 받으려고 새로 공부를 시작한 무렵이었으며 그뒤 다시 위스콘신으로 옮겨 법률학 박사학위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이번 IICAS 소장 업무를 무사히 마친 뒤에는 서울로 영구 귀국하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고 있습니다. 외국 생활이 겉으로 화려해 보이기는 해도 속으로는 외롭고 고달플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IICAS 임기를 통해 실크로드 무형문화유산과 법률 간의 융합 연구를 의욕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생각만큼은 대단합니다.
IICAS 차기 소장으로 선출된 이후 서울에 머무르던 그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이삿짐을 꾸려 곧바로 현지에 부임하게 됩니다. 그의 임기는 4년으로 내년 1월부터 시작되며, 2년간 연임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연임 여부를 떠나 그가 사마르칸트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위상을 휘날리며 멋있게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