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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소증과 코리안 드림
신아연 2013년 12월 04일 (수) 03:31:57
지난달에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신고증’이란 걸 발급받았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이 ‘증’이 주민등록증을 대신한다니 이제 신분 증명을 위해 매번 여권을 갖고 다닐 필요도 없고 체류 석 달 후부터 붙은 불법 체류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도 떼게 되었습니다.

한국 온 지 어언 다섯 달, 거소증까지 받고 보니 20년 전 호주 시민권을 받았을 때의 감회도 잠깐 스치고 귀화 후 재귀화한 것 같은 과장된 감상에도 언뜻 젖어 듭니다. 거소증이 있건 없건 일정 기간 머물게 될 한국 생활에 큰 차이는 없을 텐데도 ‘증’에서 오는 묘한 느낌 탓입니다.

그건 그렇고 일을 보기 위해 출입국관리소를 두어 차례 찾아갔을 때의 정체 모를 생경함, 소외된 자들에 행해지는 무단(武斷)의 기미를 지금껏 떨쳐내지 못해 이 글을 씁니다. 중국 동포들을 대상으로 출입국관리소 주변에 어떤 울울한 거래의 분위기가 감돌았기 때문입니다.

이 서글픈 느낌은 뭘까..,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중에 저를 조선족으로 오인한 ‘전단지 할머니’가 길을 막아서며 “바로 가 봐야 어차피 안 나와. 여길 먼저 찾아가요. 신체검사도 문제일 것 같은데? ” 하며 작은 쪽지를 불쑥, 그러나 은밀하고 낮은 음성에 실어 건넸습니다.

한국 와서 ‘조선족 같다’는 소리를 더러 들어온 터라 “여기까지 왔으니 일단 출입국관리소부터 가 보구요, 나중에 들를게요.”라며 저도 천연덕스레 대꾸했습니다.

여느 전단지와는 달리 마치 ‘접근’을 시도하는 ‘삐끼’의 그것처럼 손에 ‘앵기’도록 쥐어주는데, 도대체 가 봐야 ‘안 나온다’는 것이 거소증을 말하는 건지, 찾아가라는 ‘거긴’ 또 뭘 하는 곳인지, 재중동포들은 신분 문제에 어떤 가려운 곳이 있기에 애를 태우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뭔가 법대로 안 되는 구석이 있으니 ‘해결사’들이 주위에 있을 테고, 모종의 편법이라도 있다면야 사람 사는 일에 그만해도 다행이며 어쨌거나 그런 수단이라도 있는 게 고맙기까지 할 테지만 찜찜하니 개운치 않은 여운 또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마주 오던 아주머니 하나가 “이제 한국 거소증도 나왔으니 좀 좋으냐, 우리 한번 열심히 살아보자.”며 달뜬 연변 사투리로 누군가와 희망에 부푼 전화 통화를 합니다.

우리에겐 그저 무덤덤한 일상의 나라, 아니 무덤덤만 해도 다행이고, 온갖 불평 불만에, 비난과 남 탓에 죽겠다는 소리로 노상 아우성인 나라의 같은 시공간을 가르며 이렇듯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환희의 소리가 섞여들 수 있다니요.

권태, 나태, 태만의 타성에 금이 간 듯, 잊고 있었던 수치심이 자극되며 같은 거소증이라도 누군가에겐 이른바 ‘코리안 드림’이 막 점화되는 순간, 새 출발의 상징일 수 있다는 것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아무리 20년 넘게 남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라 해도 저의 호주 살이와 조선족들의 한국 살이를 같이 놓고 '더부살이하는 설움' 운운하며 감히 동병상련을 논할 처지가 아니기에 자괴감이 더 컸습니다.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받은 전단지 중 한 장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무심코 펼칩니다.

<불법 체류 및 이혼 소송 후 불법 체류 특별 상담, 위장 결혼 입국, 한국인과 결혼 후 폭행, 별거, 금전 요구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경우 전문 상담, 일하고 돈 못 받거나 체불된 케이스, 부당 해고, 2백만 원 이상 벌금 징수 속 시원한 상담 및 해결>

한국에 와 있는 재중동포들의 시름겨움과 고통이 총망라, 집대성된 문구 앞에 아연해집니다. 아마도 앞서 말한 ‘해결사’들이 이런 류의 일을 맡아 해준다는 뜻이었나 봅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특별 상담, 전문 상담, 속 시원한 상담, 나아가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은 한국인들의 악한 의도와 악질적 행위에 기인한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코리안 드림’의 희망으로 제 곁을 스쳐갔던 조선족 아주머니의 달뜬 목소리, 밝은 음색, 연변 사투리의 고저 장단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한국 생활만큼은 절망과 좌절로 얼룩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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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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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武 (115.XXX.XXX.45)
올려다보면 끝이 없고 되도록 아래를
보면서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가 봅니다.
제가 근처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곳 사이공 에서도 거주 증 때문에 애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큰 회사든가, 출장 온 분들은 문제가 없지만, 작은 자본으로 내 사업을
하신 분들은 거주 증이 아닌 비자를 받지요. 비자도 3개월짜리 두 번
연장이면 더 이상 연장이 안 되기에 육로로 다녀 올 수 있는 가까운
캄보디아를 넘어갔다 와야 하지요.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원칙으로 돌아가듯이.
우리나라 금호 고속버스가 캄보디아를 다닙니다.
그래서 비자 때문에 바로 넘어갔다가 점만 찍고 와야 하는
분들을 위해서 차에 오르면 비자 업무를 모조리 해결해 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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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5 22:50:11
0 0
인내천 (183.XXX.XXX.95)
다시 입국하셨나요?
요즘 시절이 하수살하여 나라 걱정하는데 신경을 쓰다 보니 자유칼럼에 소홀해졌답니다.
오늘도 상경해서 국민 속이지 말고 바른 정치하라고 소리지르다 방금 도착해서 이 글을 대했습니다. 역시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자본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외교력도 아니고 오직 정의라는 것을 신 작가님의 칼럼에서도 증명이 되고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의가 변방으로 밀려나고 불법 탈법이 통용된다면 절대로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는게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는데도 아둔하게 불나비처럼 뛰어들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정해진 룰과 절차에 의해서 가동되는 사회야 말로 진정한 민주공화국인데 그렇지 못한 작금의 현실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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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8 00:24:42
2 0
김기형 (61.XXX.XXX.66)
김작가입니다.
오늘도 소금에 절여진 듯한 저의 풀이 죽은 감성을 세차게 두드려 깨우는 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고 머리가 확 깸을 느낍니다.
대오각성을 했다는 뜻이랍니다.
저는 작가님의 글에서 '장미빛 미래를 꿈꾸는 환희의 소리가 섞여들 수 있다'에서 그 주인공이 작가님이라 생각을 해봅니다.
시공을 초월한 작가님의 작가적 감성은 어떤 아우성의 시공간도 가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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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6 11:40:34
0 0
시드니 맨 (112.XXX.XXX.157)
특별상담이 많이필요한사회는, 어쩐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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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5 05:13:07
0 0
우남골 (112.XXX.XXX.157)
아메리칸드림이란 말은 많이들었는데, 코리안드림이라하니 참 격세지감이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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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4 16:00:21
0 0
김윤옥 (39.XXX.XXX.180)
세계가 한 가족 된지도 오랜 것 같은데
여전히 我他를 구별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힘 없고 나약한 약자를 돕는다는 핑계로
여기에도 편법 불법이 끼어드니
사람 사는 세상은 애초의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한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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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4 11: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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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12.XXX.XXX.157)
세계가 한가족이 되고 나니 차별은 더욱 극성인 듯 합니다. 알아버렸으니 더 착취를 한다고 할까요... 나와 타자의 구분의 경계, 그 경계가 흐려지고 자아가 무한 확장될 때 인류애가 구현되는 거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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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5 17: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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