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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지지 않는 정지표지판
박상도 2013년 12월 16일 (월) 01:40:42
하던 방송 일을 잠시 멈추고 미국에서 2년 동안 대학원을 다닐 때였습니다. 40을 훌쩍 넘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운전이었습니다. 특히 신호가 없는 교차로를 지나는 일이 제게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미국 도로에서는 STOP표지판이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완벽하게’ 정지를 했다가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완벽한 정지'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지’표지판에서 제대로 정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각형의 빨간색 바탕에 흰 글씨로 STOP이 쓰여진 표지판 앞에서 늘 어색하게 속도를 살짝 줄이는 척 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운명의 그날도 필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전을 하며 동네를 빠져나와 큰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STOP신호 앞에서 살짝 멈추는 시늉만 하고 이내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약 10초 후 어디서 나타났는지 미국 경찰차가 필자가 운전하던 차의 꽁무니를 따라잡기 시작했습니다. ‘일단정지’를 위반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필자는 ‘저 경찰차가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네’하고 생각하며 2차로로 차선을 변경해서 길을 터주려 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차는 곧바로 제 차의 진행방향으로 따라붙으며 라이트를 번쩍이며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도대체 왜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하게 계속 운전을 하려고 하려는 찰나 아까 골목길에서 큰 길로 나올 때 봤던 STOP사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길가에 차를 대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글라스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경찰관이 다가왔습니다. “정지 위반입니다. 서는 척하고 실제는 서지 않고 갔어요.” 며칠 후 벌금고지서를 받아 들고 필자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185달러, 무려 20만 원에 가까운 돈을 벌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남의 나라에 유학 와서 쓰는 돈도 아까운데 벌금까지 보태주다니… 이 미련한 나라는 자동차가 정지했다가 다시 출발하려면 연료가 얼마나 더 낭비되고 배기가스가 얼마나 더 나오는 지 알고는 있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며칠을 투덜거렸습니다.

하지만 벌금의 효과는 말 그대로 즉효였습니다. 그날 이후, 필자는 단 한 차례도 STOP사인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나서는 당장은 불편하더라도 법규와 규칙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더 편리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호가 없는 사거리에서 일단 정지를 지키게 되면 아무리 혼잡한 시간이라도 사거리에 먼저 도착한 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게 됩니다. ‘First come, first pass(먼저 온 차가 먼저 지나간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제대로 실천하게 됩니다. 이러니 교차로에서 ‘저 차가 먼저 지나간다고 들이밀면 어떻게 하지? 그럴 땐 살짝 핸들을 꺾어서 저기 저쪽으로 공간을 확보해서 내가 먼저 지나가야지’라는 식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STOP사인을 위반해서 벌금을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벌금이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액수가 아니었다면 필자는 계속 정지하는 시늉만하면서 지나쳤을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일단정지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는 정지했다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표지판이 세워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것이 잘 지켜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일단정지를 지키지 않아서 벌금을 냈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2년 여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STOP사인을 항상 지켰던 필자 역시 어느 샌가 일단정지 표지판 앞에서 슬쩍 속도만 줄일 뿐 정지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일단정지 신호에서 정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필자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한번 깊게 생각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도대체 지킬 생각도 없고 지키게 만들 의지도 없고 그래서 지켜지지 않는 저 표지판을 왜 세워두는 걸까?’

   
지키지도 감시하지도 않는 일단정지 표지판의 용도는 사고가 났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일단정지를 수없이 위반하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법규는 지킬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남들은 다 지키지 않고 쌩쌩 지나치는데 나만 완벽하게 정지한다면 오히려 튀는 행동으로 비칠 것 같아서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단속하는 입장도 매우 조심스러워집니다. 여태껏 단속하지 않다가 오늘부터 단속을 한다면 사람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지선 준수와 교차로 꼬리물기는 명백한 법규 위반입니다. 따로 단속하겠노라고 홍보할 필요도 없이 바로 벌금부과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의 계도기간을 거처 이제야 단속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위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잘한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상 이러한 단속이 한 철로 끝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니 사람들 마음 한편에는 ‘이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이 자라납니다.

가끔 운전을 하다 보면 얌체 같은 운전자들을 만납니다. 실선에서 차선 변경을 하고 신호 위반을 하고 불법 좌회전을 하고 주차 구역이 아닌데 주차를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교통경찰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위반을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단속되지 않고 남들보다 빠르게 혼잡한 곳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속으로 외칩니다. ‘지키는 놈만 바보지’하고 말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어쩌다 단속에 걸리게 되면,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는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같은 위반을 해도 어떤 날은 걸리고 어떤 날은 무사 통과니 나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단속에 적발된 사람의 불만은 더욱 증폭됩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니 갈피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만 위반한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잡냐'는 겁니다.

결국엔 공권력의 권위도 같이 무너집니다. 권위는 일관된 대응과 공정한 집행에서 나옵니다. 지구대에서 난동을 부리는 시민들이 많다고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경찰이 우스운 겁니다. 서양 격언에 ‘법에 최고의 권위가 없으면 자유의 상태도 없다(There is no free state where the laws are not supreme)’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권위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닐 겁니다. 미국 도로에선 손톱 끝만한 작은 위반이라도 경찰의 눈에 포착되면 지옥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추격을 합니다. 이러니 사람들의 머리 속에 ‘경찰에게 걸리면 못 피한다’라는 인식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룩한 가장 커다란 변화 중 하나가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구태를 없애버린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재벌 회장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새로운 질서를 꿈꾸어 봅니다. 돈이면 다 되는, 돈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하는 세상이 아닌 이성과 정의와 양심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말입니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는 자유가 구속이고 법이 구원이다.'라고 했습니다. 필자는 법이 약자에게 구원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권력이 우스워지면 강자에게든 약자에게든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지켜지지 않는 일시정지 표지판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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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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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K (14.XXX.XXX.156)
아직 정지판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 후진국 형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요 ? 또 안지켜지는 위험한 것 중 하나는 ? 골목이나 작은 도로에 사람이 있어도 서지 않고 운전자가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자 무척 많다는 사실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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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20: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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