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주례를 맡은 와타나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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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주례를 맡은 와타나베 씨

허영섭

2013년 12월 24일 (화) 01:58:12

지난주, 어느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가 이색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주례가 일본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례를 위해 일부러 날아온 경우라는 점에서 보통 있을 법한 일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한일 양국이 독도 영유권 문제나 종군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로 사이가 껄끄럽게 됐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서로 가깝게 왕래하는 분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나의 감동이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아키히토 국왕 생일 축하연이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삼엄한 경비 속에 진행됐다는 뉴스를 들은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으니까요.

올해로 예순여섯 살을 보내는 와타나베 아키라(渡邊章)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현재 후쿠오카에 살고 있는 건설회사 간부 출신이지요. 여느 결혼식처럼 신랑, 신부가 주연 배우였음에 틀림없지만 이날만큼은 와타나베 씨도 그에 못지않게 돋보이는 역할을 소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주례를 맡은 것은 신랑의 부친인 JSI파트너스 장상인 대표와의 개인적 친분 때문이었습니다. 대우건설을 거쳐 팬택에서 전무로 퇴직하기까지 오랫동안 홍보 업무를 맡아 온 장 대표의 두터운 일본 인맥은 건설업계 주변에서는 워낙 널리 소문난 편입니다. 그래도 아들의 결혼식 주례까지 일본 친구에게 부탁하게 될 줄이야 하객들도 미처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 대표가 대우건설 홍보과장을 맡고 있던 1988년부터 이어지는 끈끈한 인연입니다. 그때 대우건설이 후쿠오카 총영사관을 건축했는데, 함께 공사를 맡은 일본 회사가 하자마구미(間組)였습니다. 와타나베 씨는 당시 그 회사의 영업과장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연한 얘깁니다만, 이날 결혼식은 모두 우리말로 진행되었습니다. 와타나베 씨가 신랑, 신부를 마주보게 하고 맞절을 시켰는가 하면 성혼선언문도 낭독했습니다. “부부가 되기를 맹세했으무니다(맹세했습니다)”, “선언하무니다(선언합니다)”처럼 독특한 일본식 어투가 하객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을 뿐이지 진행에 전혀 차질은 없었습니다.
그는 인사말을 통해 “결혼을 축하하며, 주례라는 중임을 맡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다만, 주례사만큼은 그가 일본말로 읽어 내려가는 동안 우리말로 번역되어 자막으로 띄워졌습니다. 웬만큼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다고는 해도 긴 주례사 전체를 우리말로 전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주례사 내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속담을 인용하며 신랑, 신부에게 “무(大根)의 장점을 받아들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에서 깍두기 김치나 갈비찜에 무가 들어가지만 일본에서도 무가 생선조림 요리와 단무지로 쓰이는 사실을 지적하며 여러 가지 맛을 흡수하여 내부에 축적하는 힘을 발휘하도록 권고한 것입니다.
서로의 집안 가풍(家風)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가급적 빨리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도 “무를 너무 삶게 되면 오히려 맛을 떨어뜨린다”며 자신만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도록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와타나베 씨는 두어 달 전쯤 주례를 부탁받고는 미리 상당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이웃에 사는 한국인 교수로부터 결혼식 용어에 대해 교습을 받은 것은 물론 결혼식 비디오를 들여다보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익혔다고도 하지요. 자기로서는 이토록 열심히 연습했는데, 식순에서 예물교환 등 일부 순서가 삭제되자 불평 아닌 불평을 드러냈다고도 합니다.
후쿠오카 총영사관 공사를 맡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하던 때부터 우리말을 배운 것이지만, 한국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나들이 클럽’을 만들어 한국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무렵의 일이라고 합니다. 현재 회원이 300여명으로 늘어난 클럽에서 그는 부회장 직책을 맡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2007년 회사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그 횟수가 30여 차례에 이른다고 합니다. 열렬한 막걸리 애호가가 된 것도 그런 결과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장상인 대표의 얘기도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와타나베 씨의 네 자녀 가운데 3명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고 하니까요. 보통 100명 안팎의 친지들을 가려서 하객으로 초청하는 일본 결혼식 풍습을 감안하면 초청받았다는 자체가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피로연에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는 노래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다고도 하지요. 그가 이런 식으로 일본 결혼식에 참석한 게 대략 열댓 번 이상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를 개인적인 교류와 똑같은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와타나베 씨가 정말로 한국을 좋아한다고 해도 “독도는 어느 나라 땅이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거의 답변을 얼버무릴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럴지라도 교류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굳이 과거사 문제를 따진다면, 그가 근무했던 하자마구미가 식민 침탈기에 어떻게 역할했는지에 대해서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압록강 철교와 한강 인도교를 놓은 회사니까요. 당시 조선총독부 공사를 맡았던 오쿠라구미(大倉組), 시미즈구미(淸水組) 등과 함께 조선 침탈에 앞장섰던 민간업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회사가 대우건설과 지은 후쿠오카 총영사관이 한일 관계에서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양국 건설회사가 공동으로 일본에서 시공한 최초 사례였습니다. 기와를 멋들어지게 틀어 올린 한옥 스타일의 총영사관은 요즘도 후쿠오카에서 상징적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고 합니다. 쓰라린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함께 손잡고 미래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와타나베 씨는 그날 결혼식이 끝나고도 하루 더 머무르면서 천안공원묘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지난 5월 타계한 진재순 한일건설 회장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직접 묘소를 찾은 것이었지요. 진 회장이 후쿠오카 총영사관 공사 당시 대우건설 영업담당 본부장을 맡았었기에 서로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결혼식이 끝난 지 일주일 남짓 지났고, 와타나베 씨도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결혼식 장면은 아직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약간 더듬거리던 그의 주례사는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을 동원한 신랑 가족들의 멋들어진 ‘아베 마리아’ 연주만큼이나 앞으로도 오랫동안 훈훈한 기억으로 간직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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