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지_(방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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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방재욱

2013년 12월 25일 (수) 06:34:07

정년퇴임을 하며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그동안 간직해온 편지들 중에서 대학 은사이며 대학원 지도교수님이 보내주신 1999년 12월 2일자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편지는 당시 1년간 안식년(安息年)으로 미국 Texas A&M 대학교에서 지낼 때 내가 보내드린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습니다. 14년 만에 다시 읽는 편지 내용에서 선생님의 학문과 삶에 대한 열정과 제자를 아껴주시는 따듯한 마음이 그때보다 훨씬 더 진하게 다가와 가슴이 찡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편지는 내게 간직되어 있는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이 편지를 보내시고 2개월이 지난 2000년 2월에 타계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부음을 받고 선생님의 영전에 직접 인사를 올리지 못해 지금도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나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뇌종양 수술로 거동이 불편하셨던 선생님이 75세의 연세에 보내주신 편지는 분량이 6쪽이나 됩니다. 선생님은 평소대로 편지에 한자를 많이 섞어 쓰셨습니다. 그래서 편지 내용 소개에서 일반 한자는 한글로 바꾸어 표기하였고, 주요 한자는 ( )로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전공 용어는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로 설명을 가필했습니다.

편지의 1쪽은 다음(사진)과 같이 나의 안식년 미국 방문연구 축하와 안부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편지의 내용에는 평소 음악 감상을 즐겨하시던 삶의 모습과 일본에서 지내시던 어린 시절 추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연구해 오신 식물염색체(특히 호밀)에 대한 관심과 함께 당시 사회적으로 관심이 높던 사람 유전체 분석이나 유전자조작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이 담겨 있어 75세라는 연세가 느껴지지 않는 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잘 소일하고 있습니다. NHK 위성TV에서 아침 8~9시에 일본 국내외의 연주가(演奏家)의 다양한 장르의 생음악을 접할 수 있어 음악 감상 60년의 경력을 가진 나로서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금요일에는 Classic의 시간이 3시간이나 됩니다.
NHK에서는 원예(園藝)의 프로도 많아 사대(師大) 온실을 30년 직접 경영한 나는 계속 새로운 지식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 생물학과가 수십 개 되지만 제대로 된 온실을 가진 과는 서울사대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NHK에는 식물, 생물생태(生物生態)에 관한 내용도 많아 이해가 잘 갑니다.

며칠 전 사람 염색체(染色體)의 22번의 全 DNA가 분석되어 human genome(참고; 사람 유전체, 사람의 유전자 전체를 지칭함) 연구에 대성과를 올렸습니다. 22번 염색체는 21번과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여 1957년에 Down증(참고; 21번 염색체를 3개 지녀 나타나는 다운증후군)이 trisomic(참고; 삼염색체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21번인지 22번인지 구별을 못하였고, banding 기술도입(‘67년경) 후에 21번임을 확인하게 되었지요.

호밀도 전 염색체의 DNA 분석이 완성되면 B염색체의 기원과 다른 맥류(麥類, 참고; 보리, 밀, 호밀, 귀리 등 보리 종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 호밀의 야생종(野生種)과 친화 관계 그리고 소맥속(小麥屬)과의 친화성과의 관계도 밝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아직 missing link(참고; 알 수 없는 연관)는 존재할 것입니다.

유전자조작(遺傳子操作)은 성공적이었으나 주로 농약에 대한 내성(耐性)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미국산 콩, 옥수수를 전면 수입 금지하고 일본서도 된장, 간장 양조회사에서는 미국산 콩을 사용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두부의 80%가 미국에서 유전자 조작된 콩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회 문제가 되고 있고, 콩나물, 식용유, 된장, 간장도 문제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두부를 좋아했는데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두부도 안심하고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동경(東京)서 자랄 때, 길 건너의 두부공장에 동갑 친구가 있어 4살부터 8살까지 공장이 놀이터가 되어 두부와 그 가공 식품의 제조과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요.

편지는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있는 따님의 소식과 함께 같은 연구실 출신인 안 교수, 나 교수, 권 박사와 우 교수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어졌습니다(내용 중략). 그리고 20세기 마지막 달의 편지답게 ‘좋은 21세기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마감되어 있습니다.

집 사람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
나는 작년 6월에 넘어져 오른손을 다쳐 글씨를 빨리 못 써 이 편지를 쓰는 데 3일 걸렸습니다. 난필다사(亂筆多謝).
좋은 21세기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이 웅 직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올곧고 원칙론이 강하신 선생님의 따듯하며 엄한 지도를 받으며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연구실의 1호 박사이기도 한 나는 선생님이 일생동안 연구해 온 호밀을 대상으로 ‘한국 호밀의 세포유전학적 연구’란 주제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뜻을 이어 교수 임용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식물염색체 연구의 외길을 걸어왔습니다.

편지의 말미에 6개월 전에 넘어져 오른손을 다쳐 이 편지를 쓰시는 데 3일이 걸렸다는 대목과 ‘난필다사(亂筆多謝)’라는 말에서 교수님의 애잔한 제자 사랑이 느껴집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의 구절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그간 내가 제자들과 함께 지내온 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선생님처럼 75세 넘도록 학문과 삶에 대한 열정과 제자를 아껴주는 따듯한 마음을 가져보려 다짐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