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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실은 인생 파노라마-18번을 통해본 나의 개인사 <하>
김장실 문화관광부 종무실장 2007년 08월 22일 (수) 01:10:44

이제 성인이 된 이후 제가 제일 즐겨 불러서 소위 18번 격에 해당하는 노래들의 변천사를 연대기 별로 소개할까 합니다.

대학 다닐 때 주변 친구들은 팝송을 많이 불렀지만 저는 한사코 트로트 스타일의 우리 대중가요에 매달렸습니다. 대학 1~2학년 때에는 남인수가 불렀던 '울어라 기타줄아'라는 노래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재수를 하고 들어간 대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우울하고, 경제적으로 몹시 궁핍하여 젊은이들이 누리는 낭만과 거리가 멀었던 생활의 나날이었기에 남인수의 그 노래에 나오는 사랑의 열병은 없지만 타관객지의 신산한 삶을 달래주는 이 노래를 위안 삼아 지냈습니다.

특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된 고시공부의 막간에, 특히 고시반의 회식이 있는 날에 심각한 표정으로 폼을 잡고 그 노래를 먼저 부르고, 앙코르가 있으면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접속곡으로 불렀습니다.

1970년대 중ㆍ후반 겨울 방학에 경남 남해군 이동면에 있는 용문사에서 시험 준비를 할 때 마음이 여러 가지로 갈리면서 집중이 잘 되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에는 한나절 이상 인근 산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여러 노래를 불렀고, 그러면 가슴에 쌓인 멍울이 어느 정도 풀어졌습니다.

시험공부가 덜 되었던지 학부시절에는 끝내 합격하지 못하고 시험 마무리를 위해 197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 다닐 때 지금은 대학교수인 전북 출신의 한 원우를 만나면서 혜은이가 불러 히트했던 '제3 한강교'를 한동안 열심히 부르고 다녔습니다. 고시 준비 중 막간의 여유가 있는 날 신림동 막걸리 집에서 젓가락 장단에 맞춰

이 노래를 비롯한 수많은 뽕짝을 신나게 부르며 억압된 청춘의 한을 풀었습니다.

1979년 말 고시에 합격하고 문화공보부에서 근무하면서 선후배들과 퇴근 후에 식사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계기가 많이 생겼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부터 이난영의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로 애창곡이 바뀌더군요. 그 이후 6~7년간 계속 18번곡으로 점찍어 노래하곤 했습니다.

1987년 12월 말 잠실 호수 변에 있던 '길목'이라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는 곳에서 늘 그러하듯이 나의 애창곡인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난데없이 무대 왼쪽 중간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무대 쪽으로 오면서 '그래 내가 전라도 사람이다' 라는 말을 하며 엉엉 울더군요. 아마도 저의 노래가 그 분 마음의 아픔을 흔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는 1989년 8월 미국 유학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배호의 '안녕'이란 노래로 대체되더군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주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고, 휴일 하와이 호놀룰루시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노래방에 우리 식구가 함께 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때로는 동료 유학생들과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예외 없이 배호의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시절에는 하와이 한국 텔레비전 방송의 프로그램 중 KBS의 '가요무대'를 즐겨 시청했는데 한해가 다가는 연말 무렵 가슴을 후벼파는 그 시절 그 노래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고난, 잘못한 일에 대한 회한,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뒤범벅이 되어 일시적으로 흥분상태에 빠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혼자 눈물 지으며 배호의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답니다.

1992년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에도 그 노래를 계속했는데, 어느 날 귀가 길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틀어놓은 카 스트레오에서 그 당시 인기 있던 주현미의 쌍쌍파티라는 테이프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테이프에 담긴 여러 노래 중에 유난히 손인호의 '하룻밤 풋사랑'이라는 노래가 마음에 들어 그날 이후 그 곡으로 애창곡이 바뀌었습니다. 청춘시절 가난한 데다 고시준비도 해야 하므로 하룻밤 풋사랑도, 뜨거운 정념이 마음껏 발산하는 연애도, 애끊는 이별도 있을 리 없었지만 그러기에 더욱 뜨거운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4~5년 동안 줄곧 그 노래를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블 TV를 켜다 종로구민 노래자랑대회를 보게 되었는데 어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조미미의 '여자의 꿈'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경남 남해군 상주백사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이 노래를 애절하게 부른 기억이 번개처럼 되살아났습니다. 이 노래도 4~5년 이상 18번곡 반열에 오르며 계기가 있을 때마다 열심히 불렀습니다.

문화부 예술국장을 2년 3개월 쯤 하다가 2003년 6월 초 문화부가 설립한 국립예술계 대학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사무국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사실 그 때 저는 97년 이후 전개된 일련의 정치사회적 변동기를 맞아 개인적으로 침체를 거듭하고 있는 형국이라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학교 현안 업무 해결에 많이 매달렸습니다. 국회에 법안도 내고, 관련 부처를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직제도 늘리고, 예산을 많이 확보하는 데 전력을 경주했습니다.

2004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로 여의도 국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예술학교가 있는 성북구 석관동에서 여의도에 있는 국회까지는 1시간 가까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이미자의 노래를 카세트 테이프로 들었는데 그 많은 히트곡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노래가 점차 '옥이 엄마'와 '첫눈 내린 거리'로 압축되더군요.

이제 이 두 곡은 제가 가장 아끼는 노래입니다. 두 곡 모두 엘레지인 데다 여자가수가 부른 노래라 노래방에 가면 항상 남성 음역에 적합한 코드로 바꾸어 놓고 신중하게 폼을 잡은 후 이 노래를 부른답니다.

이렇듯 세월 따라 인생도 변하고, 좋아하는 노래도 이렇게 변합니다. 앞으로 저의 18번곡이 몇 번이나 바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가고 있는 삶의 여정이 어떻게 될지 잘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노래 실은 우리 인생은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좋은 노래가 있어 좋은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교차되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우리의 삶은 좀 덜 쓸쓸하고, 어쩌면 더욱 풍요로울 것입니다.
<끝> 
 
김장실:1955년 경남 남해 출생. 영남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거쳐 미국 하와이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1979년 제 23회 행정고시에 합격, 문화공보부 근무를 시작으로 청와대 사정 및 정무수석실 행정관, 비서실장실 및 정치특보실 보좌관, 국무총리실 교육문화심의관 역임. 문화관광부에서는 공보관 예술국장 등을 거쳐 2006년 2월부터 종무실장으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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