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해체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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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해체되는가

김홍묵

2014년 02월 19일 (수) 01:43:25

‘애완 거북보다 못한 가장’
지난해 ‘숨어서 보는 내 남편의 아찔한 일기장’이라는 책을 낸 김종태(47)씨는 가족 내에서 자신의 서열이 7위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합니다. 동갑내기 아내와 두 딸(대2, 고3),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와 거북 두 마리 다음의 마지막 순위입니다.

물론 가족 내 권력자는 아내입니다. 20년 동안 PCB(회로 기판)를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허리가 휘도록’ 열심히 일해 설계·개발담당 이사에 오른 김씨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월급 통장을 애내에게 맡긴 후부터 마지날 맨(marginal man)으로 밀려났습니다. 집에선 존재감도 영향력도 없는 허약한 아빠일 뿐입니다. 가정은 그에게 ‘낯선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밤 10시나 돼 집에 돌아오면 소파에라도 널브러지고 싶은데 아내는 쓰레기봉투를 들려 밖으로 내쫓기 일쑤입니다. 김씨가 눈병에 걸렸을 땐 거들떠보지도 않던 두 딸은 거북이 눈병 났다고 어항 옆에 붙어 앉아 퇴근하는 아버지에게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그 거북은 아버지가 사준 것인데도.

일거수일투족마다 잔소리와 불평이 늘어 갑니다. “아빠는 전생에 머슴이었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하지” “아빤 전생에 청소부였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청소를 한 번도 안 하는 거지” 딸들의 전생(前生)공박입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친구 남편들을 들먹이며 부부관계가 소원해졌다고 눈을 흘깁니다.

모계사회화한 가정에서 거세당한 가장의 ‘비루한 생존법’으로 김씨는 능글맞고 비굴해지는 처신을 꼽았습니다. 집안에서 왕따를 당해도 우울한 티를 내거나 화내지 말고, 때로는 죽은 척까지 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마당쇠, 모르쇠, 자물쇠, 구두쇠, 변강쇠가 되어야 한다는 누항의 이언(俚言)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결론입니다.

남성의 시대가 허물어지는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 여류 저널리스트 해나 로진(Hanna Rosin)은 저서 ‘남자의 종말’(The End of Men)에서 20만 년 동안의 남성 시대가 2009년에 뒤집혔다고 단언했습니다. 2009년 미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일자리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한 상황을 두고 내린 분석입니다.

여성우위의 분수령이 된 2009년 이후 미국에선 관리, 전문직의 여성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고 로스쿨과 메디컬스쿨도 여성이 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대졸자도 남자 2명에 여자 3명꼴로 변했습니다. 혼전 성생활에서도 공세적인 여성은 남성을 골라 사귀고, 결혼하면 누가 벌고 누가 아이를 키울지도 절충하는 유리한 고지에 올라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가족 패러다임의 변화는 힘을 쓰는 전쟁과 노동의 시대에 유리했던 남성성의 쇠퇴에 기인합니다. 반면 후기 산업사회, 정보 및 서비스사회에서 중요한 의사소통 능력, 사회적 지능과 집중력 면에서는 여성이 낫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여성은 기회만 있으면 도전하고 영역을 넓히는 일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추락하는 남성에게 연착륙할 수 있는 날개는 있을까요? 저자 로진의 결론은 “남자들이여! 손발만 바쁘게 놀리지 말고, 마음을 더 넓혀라”입니다. 과거 약자였던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성의 상징인 갑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문명사적 변화에 적응하라는 것입니다. 약자의 쓴맛을 씹어 삼키며, 적응과 타협의 유연성을 키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우리라고 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아내와 세 마디 이상 말을 하면 싸움으로 번질까봐 입을 닫고 사는 남편, 조기교육 열풍에 처자식을 해외에 보내 놓고 외로움과 영양실조로 휘청대는 가장, 등골이 뻐근하도록 애지중지 돌봐 준 손자 손녀들이 가족 구성원으로 쳐주지도 않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화목, 효도, 숭조(崇祖)등의 프레임에는 맞지 않는 풍조입니다.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밤새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고 꾸짖자 집에 불을 질러 어머니(43)를 숨지게 한 아들(18). 말기 신부전증 60대 어머니를 길에 버려 목숨을 잃게 한 무직자(39). 어머니와 누나가 지켜보는 가운데 말기 암 아버지(56)를 목 조른 청년(27). 치매 시어머니(82)를 목 졸라 죽여 정화조에 버렸다 5년 만에 들통 난 50대 며느리. 우리 이웃들입니다.

그들보다 더 피가 마르고 가슴이 찢어지는 회한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입니다. 내일부터 금강산에서 19차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1,000만 명에 이르렀던 이산가족 중 작년 말 남한의 생존자 수는 12만1천 480명. 매년 삼사천 명이 사망하는데 남은 이들이나마 살아생전 핏줄을 더듬고 얼싸안을 기회는 얼마나 될지...

그 이산가족들의 애간장 타는 절규와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고 상봉을 흥정거리나 볼모로 삼는 자는 패륜 이상의 범죄를 자행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천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은 아직도 사랑과 행복을 담을 수 있는 우리의 가장 귀중한 소우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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