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남은 게 있어? 소치 이야기는 이제 그만!” 그렇게 손사래 치겠지요, 그래도 꼭 되짚어 보고 싶은 대목이 있으니 어쩝니까. 복두(幞頭)장이도 대숲을 찾아 가 기어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고 외친 후에야 눈을 감았다는데.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나 끝까지 달린 박승희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2014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5백m 결선. 박승희는 선두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네 바퀴 반을 도는 짧은 레이스. 금메달이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그러나 자리를 다투던 후위(後位)에서 충돌이 일어나며 앞서 달리던 박승희마저 코스에서 밀려나 꽈당 보호벽에 부딪고 말았습니다. 이미 메달에선 멀어진 상황. 그러나 박승희는 주저 않고 일어나 달렸습니다. 균형을 잃고 또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달렸습니다.

그 레이스에서 맨 꼴찌를 달리던 중국의 리젠러우(李坚柔)가 어부지리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탈리아의 아리안나 폰타나(Arianna Fontana)가 은메달. 박승희는 동메달에 그쳤습니다. 4위로 골인했지만 그를 넘어뜨린 영국 선수 엘리스 크리스티 (Elise Christie)의 실격으로 건진 메달이었습니다. 통증과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던 것도 잠시, 박승희는 이내 해님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상대 위에 올랐습니다.

“나에게 제일 소중한 메달이 될 듯하다. 모든 게 운명일 것이고, 난 괜찮다. 대한민국 파이팅!”
“그런 게 쇼트트랙이에요. 영국 선수는 저보다 더 많이 울고 있더라구요. 참 착한 선수 같아요.”

어떤 불행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세. 벌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평정을 되찾는 마음가짐.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는 눈물과 웃음. 박승희의 해맑은 모습을 지켜보며 새삼 인생의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한 번 벌인 레이스를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 그게 인생입니다. 한 번 넘어져도,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달려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또 한 번의 찬스가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박승희는 3천m계주에서 끝내 값진 금메달로 보상받았습니다. 조해리 박승희 김아랑 공상정 심석희로 짜인 계주팀은 결승선 반 바퀴를 남기고 마지막 주자 심석희가 앞서 가던 중국팀을 극적으로 앞질러 역전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1천m 금메달은 보너스라고나 할까요. 팀 에이스로 촉망받던 심석희가 추격하는 외국 선수들을 견제하는 가운데 박승희가 끝까지 선두를 지켜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문턱에서 더 이상은 어찌할 수 없어 세상을 등진 한 가족 이야기가 가슴을 미어지게 합니다. 지난달 서울의 한 단독주택 지하에 세 들어 살던 세 모녀가 번개탄을 피워 동반 자살했습니다.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힌 쪽지, 그리고 70만 원이 든 봉투가 그들 곁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10여 년 전 가장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 뜨며 가세가 기울고, 식당일로 혼자 생계를 꾸리던 어머니마저 몸을 다치자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큰딸은 고혈압·당뇨로 앓고, 작은딸은 카드를 돌려막다 신용불량에 묶여 제대로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합니다.

지상 123층의 호화 빌딩이 치솟는 번영의 나라 대한민국 수도 서울, 그러나 자칫 한 발 잘못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입니다. 삼진까지 기다릴 여유조차 없습니다. 스트라이크 한 방 먹으면 바로 아웃될 만큼 우리 사회의 안전망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스테이크를 썰거나 쓸 데도 없는 양기를 돋운다고 보양식을 찾고 있을 때 어느 누군가는 곰팡내 나는 지하 셋방에서 라면 몇 젓가락을 냄비뚜껑으로 받쳐 들고 허기를 때운다는 사실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명품일수록, 비싼 물건일수록 잘 팔린다는 이 세상 한편에서 우리 이웃이 연탄불을 피워 놓고 눈을 감는 게 현실입니다.

경제적 최약층을 위한 선택적 복지를 부르짖다가 뚱딴지같이 모든 노인에게 연금을 주겠다고 공약을 내건 여당, 친서민 정당이라며 부자증세를 외치다가 어이없이 재벌그룹 회장에게까지 20만 원을 주어야 한다며 여당의 공약 파기를 비난하는 야당. 이런 황당한 여야의 입씨름으로 기초연금은 아직도 표류 중입니다. 그러면서도 제 편익을 챙길 때는 은근슬쩍 짝짜꿍이 되는 그들이 진정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경제 약자들을 생각하는지 의문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요.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 더는 버틸 힘이 없다고 주저앉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계절은 돌고 돌아 또다시 봄이 오고 있다고. 부디 낙담 말고 다시 일어서 걸어 보자고. 지난해 청년 고용률은 겨우 39.7%였습니다. 서울에는 80만 명 이상의 대졸 이상 학력자들이 무직자로 지낸다고 합니다. 더러는 실의에 빠지고 더러는 불만에 차 이웃과 사회를 원망하면서. 특히 취업 전선에서 좌절하고 실의에 잠겨 있을 젊은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박승희의 도전 정신을 배워 보자고, 긍정의 힘을 믿어 보자고. 그들 사이에 '박승희 효과'가 해일처럼 크게, 널리 번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엄마, 나 괜찮아!”
“응, 알아!”
TV 중계에서 박승희가 전하던 모녀의 씩씩한 대화가 귀에 쟁쟁, 들리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