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의 눈으로 돌아보는 인생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황경춘 오솔길

90의 눈으로 돌아보는 인생

황경춘

2014년 03월 27일 (목) 02:15:48

‘인생 50’이란 말을 많이 쓰던 시절에 저희들은 사회에 진출하였습니다. 100년 전 조선시대의 평균수명이 35세 정도로 추정되고, 조선조 27명의 왕 평균수명이 46세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 말은 아마 당시의 우리 평균수명과 비슷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선인들은 이 ‘인생 50’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읊었고, 16세기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명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 ‘인간 50 꿈길만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천하통일 직전에 부하의 반란으로 48세에 자결하였습니다.

광복 후, 한국동란을 전후한 사회 혼란 속에서 수많은 겨레가 목슴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 격동기를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인생 50’을 수명의 종착점이라 생각하고 산 이는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릴 적 제 사주팔자를 본 어른들이 제 운세에 장수의 괘도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몇 살까지라고는 모르겠으나 평균수명은 다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한 적은 있습니다.

생활 형편이 나아져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1960년에 52.3세로, 73년에는 63.1세로 올라갔다고 하나, 언론매체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저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직장의 미국인 동료의 회갑은, 옛 선비의 갓과 긴 대나무 담뱃대를 인사동에서 구해 요란하게 축하해 주었지만, 정작 본인의 환갑은 집에서 조용히 맞이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70이 넘도록 외국 언론매체에서 일을 하며 사회활동도 계속했습니다. 신문기자 생활을 늦게 시작하여 국내 매체 동료들과의 나이 차이가 꽤 있었으나, 민주화 운동, 대통령 선거, 판문점 정전회담 등 많은 일선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과는 나이를 잊고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이들의 성화로 팔순 잔치는 처음으로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시내 호텔에서 차리고, 기념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최근 어느 날, 90 줄에 들어서도 컴퓨터와 독서에 빠져, 자기의 인생을 관조(觀照)하고 내일의 삶을 생각하는 노인다운 차분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이 90이 넘은 계획성 없는 노인--이렇게 천박해 보이는 자화상에 마음이 초조해졌습니다. 원래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종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당시의 자신은 너무나 무책임해 보였습니다.

우리 나이로는 작년에 이미 아흔 줄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통용하는 만(滿) 나이로는 아직 80대였습니다. 그래서 90대란 사실은 굳이 따지는 사람 외에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지난달에 드디어 90회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아이들에 떠밀려 또 호텔에서 집안끼리의 축하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내외에 있는 친구들에게도 90이 되었다는 사실을 떳떳하게 전했습니다.

이때까지와 같이 엄벙덤벙 주책없이 사는 생활태도를 청산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인생의 종점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일단 5년 앞까지만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 스케줄에 맞추어 생활 방식을 조정하고, 건강에 신경을 쓰는 한편 신변 정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로 했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남은 가족이 필요 이상 당황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남자 평균수명은 78세고 여자는 85세로 향상되었습니다. ‘인생 50’이라는 구호가 최근에는 ‘인생 100세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언론매체에 100세를 넘은 분들의 생활이 종종 보도됩니다.

가끔 후배들이 장수의 비결이 따로 있냐고 묻습니다. 얼마 전 찾은 침구원의 여 원장이 장수 비결이 뭐냐고 물어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쑥스러워 으례 소식, 규칙적 생활, 넉넉한 마음가짐 등 우등생 답안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밖에 마음속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사망 원인 중 3분의 1이 암이고,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15명이라 합니다. 이런 험악한 세상에서 90세까지 무사히 살아 온 것은, 아무리 본인의 처신이 좋았다 하더라도 요행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받은 건강한 유전자(DNA)도 무시 못 할 것입니다.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 할 때 어릴 적에 들은 ‘장수의 괘가 있다’는 사주팔자 이야기를 전연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느님이나 부처님의 가호라 해도 좋습니다. 저 혼자 힘으로 지금에 이르렀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은 인생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만약 5년 후 아직도 명을 유지하고 있으면, 또 새로운 5년을 바라보며 열심히, 마음을 비우고 주어진 인생행로를 겸허하게 걸어가겠습니다.

최기웅 (211.XXX.XXX.204)

선생님 생신을 늦게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더욱 건강하셔서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십시요. 더욱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