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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학교와 DJ학원
김홍묵 2007년 08월 31일 (금) 10:09:14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한 주일 전 노무현 정권에 이례적으로 ‘쓴 소리’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당을 해체한 열린우리당의 정세균 전 의장 등 마지막 지도부의 예방을 받는 자리에서였습니다.

DJ가 거론한 것은 열린우리당의 분당, 대북송금 특검, 그리고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의 구속 문제였습니다. 믿던 도끼에 발등찍힌 격으로, DJ로서는 적잖이 섭섭했던 사안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는 먼저 분당 문제에 대해 “국민은 민주당에 정권을 줘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켜 주었는데 국민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갈라섰다”면서 “국민의 마음이 열린우리당을 떠난 것은 분당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민족적인 일을 정략적으로 상처를 입힌 데 대해 사과 했어야 했다”, “임동원·신건 두 국정원장을 아무런 증거 없이 부하직원 몇 명의 말만 듣고 구속했다”며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전직 국정원장의 사법처리에 대해서도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386정치인들에게도 “위기에 처해있고 국민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해 엄중한 반성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촉구했습니다. DJ는 정권 재창출을 원한다면 현 정권이 이 같은 문제의 청산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 같습니다.

아무튼 DJ의 훈수는 앞으로 범여권의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대권을 바라보는 친여 또는 중도 인사들이 지난 두어달 사이 문지방이 닳도록 DJ의 동교동 자택을 찾아 ‘신고’를 하고, 그의 후광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DJ는 난마처럼 꼬인 채 이합집산해온 범여권을 ‘대통합민주신당’ 하나로 엮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불과 석 달 전 “민주개혁세력이 사분오열해 선거를 제대로 못 치를 상황”이라며 “내 얘기는 여권이 하나로 뭉치라는 것”이라고 압박한 결과입니다. ‘정치 9단’다운 평정 솜씨입니다.

일본 정계에는 오래 전 ‘요시다학교’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 70세에 자유당 총재와 총리를 지낸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의 구상으로 만들어진 관료출신 정치그룹으로, 보수의 주류를 이룬 세력을 일컫는 말입니다.

전전 외교관 출신인 요시다는 전전파 (戰前派) 당인(黨人)을 몹시 싫어해, 관료들을 대거 발탁하여 정치에 입문시켰습니다. 그는 이들 ‘요시다학교’ 출신들을 통해 보수정당의 당권과 정책을 주도하였습니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운수성 차관)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대장성 차관)등 50여명이 1세대들입니다.

전후파 젊은 당인으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스즈키 젠코(鈴木善幸)들도 친 요시다파가 되었다가 후에 총리에 등극하기도 했습니다. 요시다의 제자들은 자유당이 민주당과 연합하여 자유민주당이 된 후에도 보수의 본류로 정계를 리드하였습니다. 오히라 마사요시 (大平正義),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등 2세대들이 그들입니다.

‘요시다학교’는 단지 관료들을 정계에 끌어들이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외교 전문가를 자처해 온 요시다는 재임 중 대미 강화와 일본 독립을 염원했고, 실제로 1951년 9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일 안보조약을 이루어 냈습니다. 미국이 요구하는 일본의 재무장을 유보하고, 자위대를 두어 미국의 핵 우산 보호를 받는 유리한 결론도 얻어냈습니다.

요시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키나와나 북방 섬들의 반환문제, 동남아 국가들과의 전쟁 배상문제, 한국·대만과의 국교 교섭문제, 중공과의 관계개선 등 산적한 전후 처리 문제를 제자들의 과제로 각인시켜 놓았습니다. 요시다 이후 일본 총리들의 업적들은 바로 요시다 구상을 하나씩 실천한 것들입니다.

그러한 요시다였지만, 뒷날 ‘요시다학교’의 수제자들인 이케다와 사토의 총재 경선에서 그는 철저하게 중립을 지켰습니다. 먼저 승리한 이케다나, 졌지만 근소한 표차를 보인 사토가 서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그것이 요시다 제자들이 잇달아 정권의 맥을 잇게 한 요체가 아닌가 합니다.

제도는 다르지만 DJ는 요시다보다 더 많은 수하를 거느려 왔습니다. DJ정치의 메카인 ‘동교동’은 수 십년 동안 그를 따르는 정치인과 지망생들의 성소(聖所)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도 왜 여태까지 ‘DJ학교’ 같은 별명이 정착되지 않았는지 궁금 합니다.

결과만 두고 보면 분명 DJ는 성공한 정치인입니다. 건국 50년 만에 야당이 집권하는 정권교체를 처음으로 이룩했습니다. 국난이라 할 만한 IMF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햇볕정책’을 통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첫째에 이어 둘째 아들도 국회의원에 당선시켜 정치의 대를 잇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교동’을 ‘학교’가 아닌 ‘DJ학원’으로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은 몇 가지 명확하지 않은 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DJ의 수제자, 애제자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정권 재창출은 왜 해야 하는지, 다음 정권이 수행해야 할 정책의 핵심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해온 ‘국민’의 개념도 모호합니다. 아무리 ‘깊은 뜻’도 쉽게 수긍할 수 있어야 국민이 따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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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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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ddulnal (168.XXX.XXX.66)
비교를 할 것을 하셔야지,,,,,국가의 미래를 생각했던 사람과 개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한 사람을 같이 비교 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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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04 10: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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