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에_(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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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에

방석순

2014년 05월 13일 (화) 04:47:53

같은 배에서 태어났어도 형제들의 성격이나 취향은 제각각입니다. 남달리 물리(物理)에 밝은 큰형님은 아우들만 만나면 스마트폰 강의에 열을 올립니다. 스마트폰 하나로도 종일 화제가 끊이질 않습니다. 오밀조밀 컴퓨터와 시청각 장비들이 진열된 책상머리에서 이따금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틀어 놓고서도 관련 장비들의 운용에 대한 설명이 주제를 이룹니다. 동생은 그저 다음 장면, 그다음 줄거리가 궁금할 뿐인데. 때때로 형님의 그런 설명을 위해 보던 채널이 홱홱 바뀔 때면 솔직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형님의 하드 열강(熱講)에 번번이 깨지는 동생의 소프트 무드…’ 아이스크림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날 큰형님이 그 자랑스러운 스마트폰으로 사진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스마트하지 못한 제 휴대전화에는 간신히 우표딱지만 한 사진과 글자 몇 개가 보일 뿐입니다. 생전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모과나무 아래 잔디밭에 앉은 어머니의 모습. 그 밑에 ‘우리 어머니…’ 뭐라고 씌어 있으니 더 이상은 보나 마나?

연휴 동안 휴대전화에 쌓인 메시지들을 정리하다가 다시 어머니 사진과 맞닥뜨렸습니다. 문득 사진 밑에 큰형님이 덧붙인 글귀가 궁금해졌습니다. 꾀를 내어 휴대전화에 든 메시지를 제 이메일 주소로 발송해 컴퓨터로 열어 보았습니다.

우리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우리 어머니/ (나이) 40에 6·25 맞아/ 아버지 없이 5남매 모두를 키워 주신/ 대단한 어머니/ 나이 80 사진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 어머니/ 이제 어머니 생각이 더 자주 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저세상에서 아버지 만나/ 이 세상에서의 한을 풀고/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며 글씨가 뿌옇게 흐려집니다. 평소의 형님에게선 상상하지 못했던 속마음의 표출! 그렇게 강인하게만 느껴지던 형님 흉중(胸中)에 이토록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감춰져 있었다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9년. 스마트폰 메시지는 어머니를 그리는 형님의 애틋한 마음을 진솔하고도 소박한 글로 전했던 것입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향수일까요? 아니면, 나이 탓일까요? 그러고 보니 큰형님 연세도 어느덧 팔순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이 터져 하늘에 비행기가 뜰 때마다 고향 마을엔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이 요란했다고 합니다. 겨우 중학생이던 큰형님은 출입이 쉽지 않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집 가까운 산허리에 임시 방공호를 팠습니다. 어머니는 거기서 몸을 풀고 막내 여동생을 낳았습니다. 그때 나이 갓 마흔.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화(戰火)의 위험에서 아이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핏덩어리 막내를 품에 안고, 다섯 남매를 이끌고 피난선에 올랐습니다. 바깥일에 분주하던 아버지를 기다릴 새도 없이. 단 며칠 동안 난을 피하면 된다는 말만 철석같이 믿고 어디 가까운 연안이나 섬에라도 옮겨다 주는 걸로 알았다고 합니다.

배가 도착한 땅은 어머니나 큰형님이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남해안의 거제도. 낯설고 물선 타향살이에 지쳐 이따금 어머니가 “우리 막내를 누구 줘 버릴까?” 하고 물으면 그때마다 형님은 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한창 꿈 많고 장난기 가득할 열다섯, 그 아름다운 나이에 형님은 가장이나 다름없이 어머니와 힘을 모아 동생들을 기르고 가르쳤습니다.

당연히 힘드셨겠지요. 그래서인지 두 분이 평소 다정다감했다는 느낌은 별로 갖질 못했습니다. 때로 어머니에게서는 찬바람이 이는 것도 같았습니다. “너희들, 그러면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욕 듣는다!” 그 한마디면 우리 형제들은 완전히 주눅이 들어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어머니도 이웃의 어려운 일, 곤란한 일엔 감초 아줌마처럼 나서곤 했습니다. 부산 언덕배기의 난민촌을 떠나던 날 동네 아낙들이 머리에 솥, 단지, 냄비를 이고 열을 지어 이삿짐 나르던 모습이 아직도 활동사진처럼 머리에 선합니다.

철없는 제 눈에 비친 어머니와 어린 나이에 어른처럼 살아야 했던 형님이 느끼는 어머니가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에 대해 겨우 응석도 못 부려 봤다고 투정할 정도의 어리석은 제 생각과 평생 아버지 대신 동생들 모르게 애환을 함께했을 형님의 생각이 같을 수 없겠지요. 그러니 그리움의 깊이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월, 가정의 달에 큰형님의 마음속을 더듬어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맞춰 봅니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어머니는 자식들이 곁에 있어서 더욱 정겹고, 멀리 떠나서 더욱 그리워지는 오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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