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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을 달리고 있습니다"?
박상도 2014년 08월 13일 (수) 01:20:20
7· 30 재·보궐 선거의 개표방송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멘트가 “아무개 후보가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였습니다. ‘1등을 달린다…’ 필자는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왜냐하면 필자의 상식으로는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문법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반화된 표현으로 굳어진다면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속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공중파 방송 3사의 메인 앵커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개 후보가 현재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고 얘기를 하는 상황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국립국어원 가나다 전화를 통해 ‘1등을 달리고 있다’는 표현에 대해 의견을 물어봤습니다. 답변은 의외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가 아닌 ‘현재 그렇게 쓰이고 있으며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였습니다. 필자가, “그런데 ‘1등을’에서 ‘을’은 목적격 조사가 아닌가요?”하고 묻자, “맞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틀린 것이 맞으나 비유적으로 쓰이면서 강조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표현이 관용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니 ‘1등을 달린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시험을 볼 때도 정답과 오답이 있기 마련인 것처럼, 세상 일에는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법상 맞지는 않으나 잘못된 것은 아니다'?, ‘널리 쓰이고 있으니 받아들여라'? 필자의 속이 거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얘기는 무슨 문제이든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답이 정답이라는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1 더하기 1을 2라고 쓴 사람들보다 3이라고 쓴 사람들이 많으면 1 더하기 1은 3이 맞다’는 얘기처럼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전화 응대를 하던 국립국어원의 연구원에게 “지금 하신 말씀이 국립국어원의 공식적인 입장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다행히 “공식적인 입장은 지금 전화를 주신 분께서 절차를 밟아서 질문을 해 주시면 논의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연구원께서는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아십니까?”하고 물어봤습니다. 30대로 추정되는 연구원은 “전혀 모르겠는데요.”라며 머쓱해 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1991년 12월에 SBS에서 첫 방송이 나간 ‘알뜰살림 장만 퀴즈’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주부들을 대상으로 퀴즈를 맞히면 냉장고, 전자레인지, 세탁기 같은 살림살이를 상품으로 주는 퀴즈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으로 먼저 버저를 두들기는 사람부터 답을 말하는 식이었는데,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살림도 장만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면서 꽤 많은 사랑을 받게 됐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MC였던 김학래, 임미숙 부부의 감칠맛 나는 진행도 프로그램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옥에 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김학래 씨가 썼던 “아무개 주부가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김학래 씨가 틀린 말인지 모르고 썼는지, 아니면 알고도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당시 대학생이었던 필자는 ‘어떻게 1등을 달리지? 그런 문법도 있나?’하고 반문하면서 프로그램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SBS 아나운서로 입사한 다음 해에, 갑자기 김학래, 임미숙 부부의 뒤를 이어서 동료 아나운서와 ‘알뜰살림 장만 퀴즈’를 진행하게 된 필자는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1등으로 달리고 있습니다’로 고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1등으로 달리고 있습니다’보다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가 더 찰진 표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틀린 것은 틀린 것이기에 필자는 ‘1등으로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김학래, 임미숙 부부가 진행을 맡게 되면서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한동안 계속 방송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매스미디어 이론 중에 ‘탄환 이론(thebullet theory)'이 있습니다.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내용이 마치 총알처럼 대중의 마음에 박히게 된다는 이론으로, 과거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나온 이론입니다. 요즘처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시대에는 그다지 맞지 않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알뜰살림 장만 퀴즈’가 방송되던 때에는 케이블 TV도, 인터넷도 대중화되기 이전이었습니다. 따라서 방송에서 진행자가 하는 표현은 별 다른 의심 없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일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은 대중의 머리 속에 총알처럼 박히게 된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 ‘알뜰살림 장만 퀴즈’는 대중들의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개그맨 김학래 씨가 남긴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아직도 살아남아서 선거 때마다 앵커들이 ‘애용’하는 표현이 됐습니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한 이 현상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다음은 지난 7·30 재·보궐 선거 개표 방송에서 “1등을 달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썼던 후배 아나운서에게 필자가 보낸 문자 내용입니다. “1등을 달린다는 말 대신에 ’1등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또는 ‘현재 1등입니다’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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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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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61.XXX.XXX.4)
요새 라디오 방송 듣다 보면 쓸 데 없이 '그래요'라는 아무 의미 없는 어휘를 쉴새 없이 전하는 MC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요'라는 것은 상대방의 말에 동의하는 의미로 쓰여져 왔는데 전혀 동의라는 의미가 필요없는 상황에서 남발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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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5 00: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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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뫼 (221.XXX.XXX.159)
좋은 지적입니다
요즘은 지상파 3사에서도 문법이나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들이 넘치던데요
특히 골프 방송에서 ~~게요란 표현은 엄청 거슬리는데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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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10: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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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1110kr (183.XXX.XXX.70)
옳은 말씀입니다. 모범답안자가 좀 있어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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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09: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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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남 (175.XXX.XXX.124)
<행복한 추석되세요>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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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09: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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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지 (115.XXX.XXX.75)
현실 언어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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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3 09: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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