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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보름달
신아연 2007년 09월 24일 (월) 08:49:52
작년 추석에 저는 한국에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반나절 정도만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추석 전 한 달 간 서울 친정에 머물다 공교롭게도 추석 당일에 호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던 것입니다.

부랴부랴 차례를 지내고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친척들을 만날 새도 없이 아쉬운 마음으로 인천 공항으로 내달렸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연일 북적대는 인천 공항이 그 날은 그렇게 한산할 수가 없는데다 , 앞 뒤 옆 할 것 없이 기내 좌석도 텅텅 비었드랬습니다. 명절을 고국에서 보낼 요량이라면 올 사람은 이미 왔고, 갈 사람은 아직 안 갔다는 뜻일 텐데, 저는 하필 당일에 움직이느라 호들갑을 떨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비록 반쪽짜리 였지만 그래도 제게는 이민 생활 15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지낸 명절이었습니다.

지난 해 한가위는 유난히 과일이 풍성했습니다. 어린애 머리 만한 배 한 덩이를 혼자서 어적어적 푸지게 베어먹던 일은 이곳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사 중의 호사였습니다. 표주박처럼 생긴 물기없이 딱딱한 호주 배는 이름만 같달 뿐 우리 나라의 배 맛하고는 영 다르니까요.

해마다 이맘 때면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가지만, 지금 무렵 고국은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어 갈 때이지요.

계절이 거꾸로 돌아가는 호주는 한국과는 반대로 봄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에는 아랑곳없이 제 마음은 슬그머니 한국의 가을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몸은 타국에 있으면서 마음은 늘 고국에 두고 사는 오랜 버릇 탓입니다.

어찌 된 노릇인지 제 속에는 거꾸로 가는 또 하나의 시계가 있는 듯, 이민 햇수가 늘어갈수록 고국을 향해 내달리는 마음에 점점 속도가 붙어갑니다.

이곳 호주에서도 해마다 한가위 보름달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줄기 서늘한 구름을 거느리고 쪽빛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르는 쟁반같이 둥근 달은 공해 없이 맑은 하늘 탓인지, 계수나무 옥토끼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차라리 서러운 감회를 불러 일으킵니다.


몇 년 전, 남편의 직장에서는 추석이면 송편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기왕 떡을 하는 김에 가래떡도 아예 함께 맞춰버리곤 했습니다. 나설 자리 구분 못하고 추석에 끼어 든 가래떡이 생뚱맞지만 , 설이 되면 이번에는 또 송편이 자기 차례도 아니면서 능청스레 따라오니 결국 피장파장입니다.

이렇게 추석과 설 , 1년에 두 차례 ‘하사되던’ 명절 떡이 한국 직원들에 대한 차등 대우라며 한 회사에 다니는 호주 사원들의 불만이 불거지면서 몇 해 안가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어디 떡을 못 먹어서 그런답니까? 냉동실 한 켠에 천덕스레 쳐박아 둘지언정 이국만리 해외에서 맨송맨송하게 보내야 하는 명절에 그렇게라도 해서 맘을 달래보려는 것인데, 한국 이민자들의 정서를 헤아리지 못하던 호주 사람들이 참 야속했습니다.

‘고향 앞으로’를 부르짖으며 길을 나서기 무섭게 주차장을 방불케 하듯 도로를 꽉꽉 메우는 차량 행렬, 가짓 수 많은 제수 장만과 친지들 치다꺼리로 골치가 지끈대는 명절 증후군, 빠듯한 휴가 일정 탓에 피곤만 가증된다는 투덜거림 등등 , 모두가 함께 하고 싶은 그리운 고국의 모습입니다.

올 추석에도 어김없이 찾아올 가슴 한 켠의 아릿함과 애틋함을 생각하면 여럿이 모여서 옥시글거릴 수 있다는 것만도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작년처럼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올 추석에 제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저 밤하늘이 맑아 오달진 보름달 하나 만으로 푸진 한가위를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블로그 http://biog.naver.com/ayoun63 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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