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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닥친 죽음의 순간들
안건훈 2014년 12월 01일 (월) 01:07:14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죽음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또 죽을 뻔한 일을 겪기도 하죠. 실존철학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 따르면, 죽음이란 ‘자기만의 것이며(홀로 맞이하는 것이며), 확실하며(틀림없이 오는 것이며), 무규정적이며(죽음 후의 세계를 정의할 수 없으며), 결코 다시 경험할 수 없으며(한 번으로 끝나며),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가능성’입니다. 죽음의 특징을 비교적 설득력 있게 규정한 철학자라 여겨집니다. 나는 이제껏 70년 동안 살아오면서 세 번에 걸쳐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1951년 1월 30일 오전에 있었습니다. 겨울 난리 때 북한군(인민군)이 우리 동네에 들이닥쳐 피란을 미처 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과 더불어 지내야 했습니다. 우리 집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우리 6남매가 그랬습니다. 그날 유엔군 비행기들이 우리 동네를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침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할 즈음에 비행기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곧 이어 벼락 치는 소리가 뒤따르더라는 것입니다. 마당 흙이 갑자기 뒤집어지고 집안 이곳저곳에 뿌연 먼지가 치솟았습니다.

어머니는 비행기 폭격임을 직감하고, 식구들을 재빨리 모아 대청마루 뚜껑을 열고 지하실로 피신시키셨습니다. 그때 지하실로 피신한 사람들은 우리 식구 말고도 뒤따라 들어온 인민군들도 있었습니다. 지하실 바깥은 비행기 폭격으로 폭탄 터지는 소리, 집이 무너지는 소리, 비명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면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인민군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런 기도에 대해 뭐라고 하자, 할머니께선 “야, 이 녀석들아, 너희들도 살고 싶으면 함께 기도해”하고 호령하니, 그들도 모두 두 손을 모으고 할머니처럼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법 규모가 컸던 우리 집은 이렇게 해서 잿더미가 되었지만 지하실에 대피했던 사람들은 모두 생명을 건졌죠. 나에게 들이닥친 첫 번째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외국에서였습니다.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넉넉지도 못한 형편에 뱃심 좋게 나 혼자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엔 유학생들이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나는 생활비라도 벌어보려고 학교 기숙사 식당에서 일주일에 20시간씩 접시 닦기, 청소, 샌드위치 만들기 등을 했습니다. 몇 년 후 아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나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저녁 9시 반부터 자정까지 식당에서 일하고, 아내도 이웃의 ‘애 봐주는 사람(baby sitter)’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1982년 5월 중순경, 자정이 지나 식당 청소를 끝내고 자전거로 귀가하던 중 무서운 속도로 비탈길을 내려오던 백인 학생의 자전거가 나를 측면에서 들이받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이래서 죽는구나, 죽으면 안 되는데…”하면서 기절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내 옆엔 그 학생이 나를 보면서 염려스러운 듯이 괜찮냐고 물었죠. 나는 다시 살아난 것에 만족해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나의 자전거는 그 당시 학교에 등록되지 않은 상태여서 은근히 그 일로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자전거 바퀴가 크게 휘어진 것을 보면 충격이 대단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자전거를 근처에 있는 쓰레기장에 버리고 집에 와 보니, 온몸에 피멍이 들었고 곳곳에 피가 나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도 가슴이 계속 따끔따끔하면서 아픔이 가시지 않아 학교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검사를 받으니 오른쪽 갈비가 4개나 금이 갔다고 했습니다. 하마터면 객지에서 죽을 뻔했던 두 번째 위기였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1983년 9월 초에 일어났습니다. 수년간 고된 유학생활을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고 체력도 바닥이 났습니다. 1983년 여름 방학 때는 그 당시 내가 살던 곳에서 버스로 19시간이나 걸리는 뉴욕시까지 가서 교포들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이나 야채 가게에서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하루에 10시간씩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힘에 벅차 고국의 선생님께 나의 그런 상황을 알리니 선생님은 그렇게 생활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은 2학기가 시작되었으나 급히 오면 시간강사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고 하셨죠. 나는 비행기 표를 구입하기 위해 뉴욕으로, 시카고로 이곳저곳 여행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겨우 한 장의 표를 구해 우선 나만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9월 1일 소련 전투기에 의해 KAL기 007편이 격추되었습니다.

그 비행기의 항로는 내가 탄 비행기의 항로와 거의 같은 것으로 나도 그 비행기를 탈 뻔했습니다.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반도 동쪽을 지나 사할린 부근 상공을 날고 있을 때, 며칠 전 바로 저쪽 방향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었다면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했고, 곧 기내는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9월 3, 4일인가 내가 김포에 도착하니 나를 귀국하라고 했던 선생님 댁에서는 그 사건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곧 이어 미시간에 있는 지도교수로부터도 나의 안부를 묻는 서신이 급하게 왔습니다. 이것이 내가 맞이한 세 번째 죽음의 위기였습니다.

이처럼 나는 세 번에 걸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나는 어려움이 닥치면 그런 체험을 떠올리며, 죽음의 위기 때마다 나를 살려주신 분께 감사하고 내 삶의 의미를 찾곤 합니다. 내가 겪었던 그런 고비들은 나에게 바람직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그리고 조심조심 살아가라는 무언의 명령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죽음은 일상적인 나를 다시 일깨우는 각성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실존철학의 주장과 맞물려서 말입니다.


현 강원대 명예교수・통일협회 공동대표. 고려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교육철학)와 미시간주립대(논리학, 과학철학)에서 석사, 고려대와 미주리대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취득. 한국철학회 부회장, 한국환경철학회 회장, 한국역사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논리와 탐구』, 『기호논리학1』, 『기호논리학과 그 응용』, 『이분법적 사고방식』, 『확실성탐구』, 『인과성분석』, 『자유의지와 결정론』, 『환경문화와 생태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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