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 마라 갑자(甲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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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마라 갑자(甲子)생'

황경춘

2015년 03월 10일 (화) 01:46:33

정확하게 70년 전 오늘, 1945년 3월 10일, 저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징집되어, 용산의 육군 사단에 입대하였습니다. 화물차를 개조한 군 수송열차 안에서 밤새 떨며, 부산에서 이른 아침에 도착한 곳이 용산이었습니다. 얼음이 녹아 질퍽거리는 역전 광장에서 대오를 정리하고 인원 점검을 마친 우리는 용산 병영으로 행진하였습니다.

당시 3월 10일은 일본 ‘육군기념일’로 공휴일이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 육군이 만주대륙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이날에는, 5월 27일의 ‘해군기념일’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 정부가 러일전쟁 승리를 자축하여 대대적인 열병식(閱兵式)과 관함식(觀艦式) 등을 가졌습니다. 물자 사정이 좋았던 전쟁 초기에는, 쌀, 설탕, 비누 등의 특별배급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홍백(紅白) 축하 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날 저와 같이 기차를 타고 온 장정은 전부가 조선 청년으로 그 수는 천명 내외였다고 기억합니다. 이 많은 신병이 일단 사단 영내로 들어가자, 각 부대로 분산 배치되어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공휴일이라고 나눠주는 과자 후식을 곁들여 처음 하는 군대식사로 긴 기차여행의 피로를 풀며, 졸지에 달라진 환경에 쩔쩔매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시 용산에는 일본 육군 제19사단 밑에 여러 부대가 있었는데, 제가 배치된 곳은 제26부대 야포(野砲)연대로 포를 끄는 군마(軍馬)를 많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4주의 고된 신병 기초훈련보다, 이 말들과 친해지고, 그들을 씻고 깨끗하게 군대 용어로 ‘데이레(手入)’ 하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학교에서의 군사훈련과 징병검사 전후에 수시로 있었던 예비 훈련으로, 입대 후의 신병 기초훈련은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지만, 처음 하는 이 군마 ‘데이레’는 정말 무섭고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농촌에서 소는 꽤 많이 다루어 봤지만, 일본 군마를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호령부터 일본어로 된 말 다루기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잘 훈련된 이 군마들의 지능지수는 아주 높아, 우리 신병들의 겁에 질려 주춤주춤하는 태도를 반갑지 않게 여기는 듯, 걸핏하면 뒷다리로 차거나 어깨 등을 물어뜯어 상당히 위험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신병과 고참을 구별하는 지능은 대단했습니다. 말에 채이거나 물리기나 하면 반드시 고참병들의 기합이 따랐습니다.

"너희 같은 놈들은 엽서 한 장이면 얼마든 충원이 되지만, 이 말들은 귀중한 재산이야."라는 게 고참들이 흔히 뱉는 욕설이었습니다. 말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특별하였습니다. 사실 기계화가 그렇게 발달되지 않은 당시의 군에서, 전장(戰場)에서의 말의 역할은 대단했으며, 일본 군가(軍歌)에는 그들의 활약을 찬양하거나 희생을 애도하는 구절이 많았습니다.

‘흙탕물로 얼룩지고 수염이 길게 자란 이 털보의/어디가 좋아 그렇게 정답게 비벼대며 다가오나’라는 구절도 있고, ‘오늘의 전투에서 수많은 탄환을 맞고 쓰러진 나의 애마(愛馬)야/용서하라 모두가 나라를 위한 것이니’라는 애절한 표현도 있었습니다.

‘신병은 엽서 한 장으로 얼마든지 온다’는 것이 당시 고참병들의 말버릇이었으나, 군 소집영장은 엽서가 아니라, ‘아카가미(赤紙)’라 불린 붉은 용지에 인쇄된 영장으로 특별 군사우편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저승사자’라 불렀습니다.

말과의 무서운 기억만이 남는 4주간의 기초훈련이 끝난 어느 날 드디어 공포의 ‘출동명령’이 내렸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도처에서 어려운 전투를 하고 있어, 신문을 볼 수 없는 우리 신병들도 고참을 통해 어렵게 돌아가는 전세를 대충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병에게 ‘기합’을 줄 때, "너희들은 어차피 만주나 남양에서 죽을 놈들이야."라는 그들의 욕소리로 짐작이 가기도 했습니다.

무기 하나 없이 다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로 끌려가는 목적지가 어딘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부산에서 낯익은 연락선 아래 칸으로 끌려가자, 비로소 일단은 일본 본토로 이동되는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관부연락선(關釜連絡船)으로 일본 본토 서남 끝의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열차로 약 20시간 이동하였습니다.

도착한 병영은 작은 마을의 공회당을 개조한 건물로 울타리나 연병장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기차에서 내린 약 40명의 신병은 전부가 조선인이었습니다. 병사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육군소위 외에 7~8명의 일본인 기간 요원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 입구에 현판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으나, 우리 부대 이름이 ‘농경대(農耕隊)’라고 소대장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40여 명의 조선인 신병 가운데, 일본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저와 광주 출신의 ‘다무라(田村)’라는 창씨(創氏) 이름의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거의가 무학이거나 강습소 등에서 공부를 한 농촌 출신으로, 농경대라는 이상한 이름의 부대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대는 일본 수도 도쿄의 북방 약 40km의 이바라키(茨城) 현의 한 공군 기지에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병사에는 소총 한 자루 없고, 대신 삽과 곡괭이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신설 부대였습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예상하여 참호를 파는 등 노동력이 필요하여 급조된 부대로, 우리 소대에서 좀 떨어진 두 곳에도 신설의 농경대가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군사훈련은 전혀 없고 매일 참호를 파는 혹독한 노동만 있었습니다. 모내기 등 농가 일을 돕는 좀 호강스러운 날도 있었지만, 노동에 익숙지 않고 체력이 약한 저에게는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게다가 통역하는 일과, 휴일 고향에 편지 쓰는 일까지 맡아 생지옥 같은 부대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호주 전투기의 저공(低空) 기총사격(機銃射擊) 공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호 파는 일이 주목적이었던 이런 기이(奇異)한 군대생활도 넉 달이 채 안 되어, 일본의 항복으로 끝이 났습니다. 패전의 혼란 속에 귀국 길은 군용선이 없어 소형 어선으로 태풍 철의 현해탄을 건너는 목숨 건 모험이었으나, 그해 9월 초에 고향 땅을 밟아, 그리운 부모님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 유행하던 속담‘묻지 마라 갑자(甲子)생’의 행운이었습니다.

방기웅 (220.XXX.XXX.114)

저는 전쟁이후 베이비부머 세대입니다만 어르신께서 겪으셨을 참담한 고통이 조금은 느껴집니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부디 그런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잘 읽었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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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13: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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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4.XXX.XXX.38)

동감입니다. 다시는 우리 후손이 그런 욕된 삶을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옛 이야기를 남기려는 것입니다.
졸문 읽어 주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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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21: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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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리 (24.XXX.XXX.229)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요?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될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래도 남방이나 만주에서 전투하지 않고 살아오셨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요. 아니었으면 이런 글도 읽을 수 없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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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11: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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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4.XXX.XXX.38)

녜, 고생은 했지만, 운이 좋았다고밖에 생각할뿐입니다.덤으로 사는
세상에서 좋은 일도 많았지요. 토론토는 아직도 추운지 걱정이네요.
몸조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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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21: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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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112.XXX.XXX.25)

선생님의 일제 하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징집 참전 기억들이 죄송스럽게도 제겐 마치 한수산 님의 대하소설 <까마귀>를 읽는 것처럼 어떤 스토리로 스릴과 흥미까지 느껴집니다. 그간 기고하신 글들도 그렇지만 선생남의 생애를 기록한 자전적 수상집 <묻지 마라 갑자(甲子)생>이란 제목의 책을 한번 펴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1899년 생이신 고 저의 선친께서 당시 부산 영도에서 큰 여숙을 하셨는데 징집 학도병들이 일본으로 가기 전 하루를 유숙하고들 갔다는 얘길 들었는데 혹시 황 선생님은 아니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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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09: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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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4.XXX.XXX.38)

고맙습니다.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되도록 많이 남겨, 후배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쓰고 있습니다. 그 시절을 살아 온 여러 선배와
동년배 작들이 좋은 글을 남기기는 했지만...
선친께서 하시던 여관을 알지는 못 했지만, 사지로 떠나는 그런 젊은
학도병을 맞이 한 아버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 아픕니다. 민족의
비극 한 장면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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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21: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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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내 (218.XXX.XXX.180)

저희들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세월을 보내셨군요
저는 6.25부터 겪으며 살았습니다.
점 점 더 나아지는 후손들의 형편에 흐뭇해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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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09: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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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4.XXX.XXX.38)

맞습니다. 과거를 잊고 현재를 즐기고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과거와 같은 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할쁀 압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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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1 20: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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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식 (180.XXX.XXX.93)

선생님 글을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저의 부친은 갑자 다음해인 을축생이신데 1945년 일본에 끌려 갔다 해방되어 돌아 오셨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 6.25로 국군으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평생에 난리를 두 번씩이나 치르셨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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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0 15: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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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4.XXX.XXX.38)

저도 동년배 친구 중에, 일본군에 끌려 갔다 살아 남았으나,
6.25 동란으로 귀한 생명을 잃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님 생각 나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민족의
운명이고 우리세대의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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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0 19: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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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열 (121.XXX.XXX.237)

중학생때, 여의도 비행장에서 비행기 겹납고로 쓰일 모래 구덩이를 퍼던 생각이 납니다. 점심으로 빵 몇개를 배급? 받으며.
고생 많으셨습니다. 6.25 전장에서 할머니가 누른밥을 먹으면 장수한다고 하신 덕분인지, 총알이 비켜가 아직까지 덤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고마움이 새삼스러워지는 추운 아침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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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0 10: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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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4.XXX.XXX.38)

피차 오래 살았습니다. 그 모진 세월들...
간강하십시오.

글 읽고 댓글 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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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0 19:3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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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구 (222.XXX.XXX.197)

선생님, 글, 반갑게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격조를 잃지 않고, 잔잔하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이야기들을 차분히 들려 주셔서 늘 소중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꽃샘추위로는 드물게 한파주의보까지 내려진 날입니다.
외출하시는 일이 있으시면 두둑하게 입고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셔서 후학들을 많이 가르치고 이끌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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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0 09: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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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114.XXX.XXX.38)

감사합니다. 오늘은 종일 집에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며... 70년 전 오늘, 또 하나의 사건이 10여만 명의
희생자를 낸, 도쿄 대공습입니다. 우리 동족의 희생도 컷지요.
이때만이라도, 일제가 정신을 차려 전쟁을 끝냈으면, 그 생지옥의
히로시마의 원자탄 공격은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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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0 19: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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