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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망봉과 치마바위
안건훈 2015년 04월 30일 (목) 05:58:07
조선의 왕릉들 가운데 단릉(單陵)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단종의 장릉(莊陵), 중종의 정릉(靖陵) 이렇게 셋뿐입니다. 이 가운데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와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는 아주 젊은 시절에 홀로된 경우들로 그 사연이 매우 애처롭습니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13세인 1453(단종 3)년에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후 실권을 장악했을 때여서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곧 물려준 뒤 상왕이 되었고, 새댁인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진봉(進封)되었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단종은 다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유배 길에 오르고, 대비는 노산군부인이 되어 출궁되었으니 17세 때의 일입니다. 유배지로 떠나던 날 단종은 폐비와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에서 생이별을 했습니다. 그 후 이 다리는 ‘영 이별 다리’라 일컬어졌습니다. ‘영도교’란 명칭은 성종 때 다리를 보수하면서 ‘영원히[永] 건너가신[渡] 다리[橋]’라는 의미로 부르면서 정착되었습니다.

폐비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동묘 부근 작은 산 아래에 있는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초가를 짓고 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영월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폐비는 가엾이 죽은 남편을 위해 날마다 청룡사 근처에 있는 거북바위에 올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애도했습니다. 그 후 이곳은 동망봉(東望峰)이라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모진 시련 속에 생활하는 젊은 폐비를 가엽게 여긴 백성들은 음식을 몰래 폐비에게 전했고, 폐비의 편의를 위해 초막 부근에 야채시장도 마련했습니다. 폐비를 돕는다는 사실이 궁궐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이 야채시장은 여성들만을 위한 금남지역이었습니다. 동묘 근처의 여성 전용 시장은 이렇게 유래되었죠. 폐비는 근처 골짜기에서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이것이 훗날 자줏골의 기원이 됩니다.

단경왕후 신씨(愼氏)는 연산군의 처남이자 좌의정을 지낸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499년(연산군 5)에 12세로 진성대군(晋城大君)과 가례를 올렸습니다. 왕비는 총명한 분이었으며 금실도 좋았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 군사들이 진성대군의 집을 에워싸자 놀란 진성대군은 자결하려 했습니다. 이 때 신씨는 남편에게 “군사의 말 머리가 이 집을 향하고 있으면 우리는 죽을 운명이겠지만, 말 꼬리가 이 집을 향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를 호위하려는 뜻일 것이니, 확인하고 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침착하게 말하면서 말렸습니다. 진성대군이 밖을 보니 과연 반정군의 말꼬리가 집을 향하고 있었죠. 그렇게 대군을 호위한 반정군사들은 사기가 치솟아 반정을 승리로 이끌었고, 대군은 임금(중종)으로, 신씨는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무상한 것이죠. 반정 세력들은 반정의 은인일 수도 있는 그런 왕후를 신수근의 딸이란 이유로, 신수근의 처형 7일 만에 폐출해 버렸습니다. 왕후 나이 19세 때의 일이죠. 폐비가 된 단경왕후는 인왕산 아래서 살았습니다. 금실 좋게 살던 부부가 이렇게 갑자기 헤어지게 되니 중종도 폐비도 그리움에 나날을 보냈습니다. 중종은 궁궐 안에서 높은 자리인 경회루에 가끔 올라 인왕산 쪽을 바라보며 눈물지었고,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폐비는 평소에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으면서 그런 남편에 답했다고 했으니 이것이 유명한 ‘치마바위 전설’입니다.

정순왕후의 ‘동망봉 전설’과 더불어 ‘치마바위 전설은 조선시대 젊은 왕비들의 슬픈 역사입니다. 자식도 없는 두 분 폐비는 외롭게 살다가 한 분(정순왕후)은 81세에, 다른 한 분은 70세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폐비 송씨는 세상을 떠난 지 177년 뒤인 1698년(숙종 26)에 노산군과 함께 복위되었는데 한 평생 그리움 속에 살았다 하여 왕비의 무덤은 사능(思陵)이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폐비 신씨는 세상을 떠난 뒤 신씨 묘역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묘호는 단경, 능호는 온릉(溫陵)이 되었습니다. 단종은 세상을 일찍 떠나 어쩔 수 없었지만, 중종은 조강지처이며 은인인 단경왕후를 훗날 복위시키거나 보살펴 줄 수 있는 처지였는데도 그렇게 하진 않아 아쉽습니다.

두 능(1)은 모두 크진 않으나 왕비들의 성품을 아는지 단아합니다. 소나무 숲이 주변을 아늑하게 감싼 그런 형세입니다. 게다가 모두 남향이어서 멀리 외로이 있는 남편들의 능인 장릉과 정릉을 각각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왕비들의 원혼을 의리로서 답하려는 듯 왕들의 능도 지금껏 단릉으로 있습니다. 왕비들이 겪은 힘든 삶에 안쓰러움을 느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학처럼 살다간 왕비들의 삶이 여운을 남깁니다.

(1)사릉은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에, 온릉은 양주군 장흥면 호국로(일영리)에 있으며, 각각 사적 제 209호, 21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릉은 경춘선 사릉역이나 금곡역을 이용해 갈 수 있으나 온릉은 현재 비공개 능입니다.

현 강원대 명예교수・통일협회 공동대표. 고려대 철학과를 나와 서울대(교육철학)와 미시간주립대(논리학, 과학철학)에서 석사, 고려대와 미주리대에서 각각 박사학위를 취득. 한국철학회 부회장, 한국환경철학회 회장, 한국역사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논리와 탐구』, 『기호논리학1』, 『기호논리학과 그 응용』, 『이분법적 사고방식』, 『확실성탐구』, 『인과성분석』, 『자유의지와 결정론』, 『환경문화와 생태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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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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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식 (180.XXX.XXX.173)
너무 안타까운 이야기 입니다. 두 여인의 한 맻힌 가슴을 생각하니 눈시을이 붉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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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15: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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