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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밤이에요
박상도 2015년 06월 01일 (월) 00:24:05
“아름다운 밤이에요.”

1991년 <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장미희 씨의 수상 소감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상 소감의 보편적인 매뉴얼은 “부족한 제게 과분한 상을 주셔서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개 영화감독님 저를 캐스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영광을 함께 고생하신 모든 분들과 나누겠습니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여우 주연상을 받게 된,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배우가 “아름다운 밤이에요.”라고 느닷없이 매우 낯선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이 낯섦에 시상식 MC였던 점잖은 이계진 아나운서조차도 웃음이 나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참으로 좋은 수상 소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쟁쟁한 후배 연기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여우 주연상을 받은 장미희 씨에게 그날은 평생 기억되는 아름다운 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시상식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도 수많은 스타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었던 그날은 아름다운 밤으로 기억됐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매우 적합한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그때는 왜 그렇게 오글거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아름다운 밤이에요.”는 그 이후 수많은 코미디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일상생활에서 관용적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6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한국 대중문화 예술의 발전과 예술인의 사기 진작을 위해 1965년 제정된 백상예술대상은 올해로 51회째를 맞이했습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지난 1년간 방영 또는 상영된 TV프로그램의 제작진과 출연자에게 시상하는 국내 유일의 종합예술상입니다. 이번 백상예술대상에서도 멋진 수상 소감이 많이 있었습니다.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악역 연기를 멋지게 소화했던 조진웅 씨는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단지 그것이, 제게는 굉장히 큰 행운이자 영광입니다. 훌륭한 후보 분들을 제치고 이 상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들 앞으로 더 똑바로 관객들과 진심으로 소통해라! 이런 뜻으로 알고 상을 받겠습니다.”라는 수상 소감을 남겼습니다. ‘관객들과 진심으로 소통해라’는 말 한마디 속에는 이 배우가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연히 받아야 될 배우에게 상이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배우가 다 이렇게 멋진 수상 소감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어려움 속에도 제게 기회를 주신 제작사 아무개 대표님과 관계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아무개 대표님, 또 다른 아무개 대표님, 스태프 여러분, 매니지먼트 후배 아무개 대표님 감사합니다.”라며 예의 바르게 자신을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인사를 한 분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수상 소감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상식에서 시청자가 알지도 못하는 많은 이름들을 거론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것은 왠지 앞서 조진웅 씨가 얘기했던 ‘소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만약에 모든 수상자가 한결같이 “아무개 제작사 대표님 감사합니다. 메니지먼트 기획사 아무개 대표님 제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고생하신 감독님 감사합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얘기 한다면 그 시상식을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는 많지 않을 겁니다. 예전에 권투경기에서 동양타이틀 또는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선수가 했었던 한결같은 승리 소감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프로모션 아무개 대표님, 아무개 전무님, 아무개 관장님…….(보통 이렇게 한 스무 명 정도 이름이 나열되곤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15라운드를 경기를 마치고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진 상태에서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던 그 모습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립니다. 이런 류의 소감만 지긋지긋하게 듣다가 어느 날, 홍수환 선수가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 선수를 판정으로 이기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라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소감과 함축된 기쁨을 표현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많은 국민이 진정한 챔피언다운 소감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관객이 영화를 통해 배우를 만나는 것은 학술적으로는 ‘유사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이라고 합니다. 배우는 영화에서 극중 인물을 표현하게 되는데 관객은 그러한 배우의 모습을 보며 그 배우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에 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역을 하는 배우는 왠지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운 존재가 되고 조금 모자란 듯한 역을 하는 배우는 평소에도 모자란 사람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는 그 배우의 평소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수상 소감까지 연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수상 소감이야말로 관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대상을 수상한 최민식 씨의 수상 소감은 그래서 더욱 빛났습니다.

“20대 때, 더 거슬러 올라가서 고등학교 때, 영화를 하고 싶고 연극을 하고 싶다면서 꿈을 키웠던 그 시절의 최민식과 지금의 최민식이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많이 부끄럽습니다. 너무 많이 변했고 너무 많이 물들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좋은 작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영화가 흥행이 될 것이냐 안 될 것이냐? 이런 것부터 많이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그 여백을 끈질기게 붙잡아서 더 좋은 작품으로 여러분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되도록 더욱 더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날 최민식 씨의 민낯을 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솔직한 수상 소감을 통해 그가 앞으로도 매우 훌륭한 배우로 남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종상과 청룡영화제 시상식이 남아 있습니다. 판에 박인 수상 소감이 아닌 대중과 소통하고 진심을 담은 수상 소감으로 이야기가 풍성한 ‘아름다운 밤’이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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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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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술시 (117.XXX.XXX.3)
국민의 민도가 바뀌어가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언제든 어디서든 이렇게 참신한 촌철살인의 말씀들을 할 수있는 의식으로 무장되어야 되는데...스스로는 어려워 보이니 국민들이 관습적으로 변화시켜 줘야 겠지요. 항상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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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2 12:2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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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식 (211.XXX.XXX.36)
박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문제점을 발견해 내는 안목, 그것을 객관화시키고 명료하게 문장화하는 힘, 그리고 우리의 비평정신을 일깨우는 그 문장이 저는 너무 좋고 또 부럽습니다. 계속 좋은 글 쓰시기 바랍니다. *홍수환의 그 소감은 남아프리카였던가요, 아놀드 테일러라는 선수를 이기고 밴텀급 챔피언이 되었을 때의 말이라 기억됩니다만, 제 기억이 잘못 되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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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1 10: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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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도 (222.XXX.XXX.250)
홍태식 선생님.
선생님의 지적대로 홍수환 선수가 남아공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 선수를 판정으로 이기고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제가 혼동했습니다. 선생님의 지적대로 문장을 고치겠습니다.
앞으로 사실관계에 더욱 주의해서 글을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상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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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1 11: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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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열 (121.XXX.XXX.237)
박아나 글쓰느라 잠이 부족하지 않았나요.
"아르다운 밤"은 예술의 세계에서는 박아나가 바라는 데로 이어질 것이라고 나도 기대하고 믿습니다.
"대중과 소통하고 진심을 담은" 세상이 정치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나라가 정말 더 살기 좋은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박아나의 아름다운 입에서 나온 말이 듣는 이들로 하여금 받아드려질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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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1 09:3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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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112.XXX.XXX.25)
ㅎㅎㅎ 한참 잊고 있었던 단어
유사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를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도 잘 까먹어 파라 포셋트의 파라라고 되내이기도 했거든요.
수상소감 건배사 등은 그 자리의 분위기와 격조를 정해주지요.
연기자라면 더욱 더 사전에 준비(공부)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 더 적절하고 자연스런
즉흥 스피치를 하게 되겠지요.
로버트 드니로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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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1 09: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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