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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린 의사의 유언
유능화 2015년 06월 29일 (월) 02:57:47
병원 단골 어르신 중 한동안 못 보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안부를 여쭤보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양쪽 귀가 거의 안 들려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시고는 “와까리마스까?” 하고 묻던 K 어르신, 하얀 피부에 늘 미소를 머금고 항상 “수고하시네요…” 라고 인사하시던 P 어르신, 젊었을 때 고스톱으로 밤을 새웠다고 자랑하시던 L 어르신… 모두들 기억에 생생한데.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남의 병을 고쳐 주는 의사가 죽게 되면 묘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내 직업이 의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료의식은 물론 다른 이들보다 더 측은지심이 생기곤 합니다. 또 그들이 죽음을 앞두고 인생과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쓴 글은 그 어느 철학자의 것보다 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한 미국 의사의 글은 나 스스로를 좀 더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폴 캘러너시(37)는 미국 스탠퍼드 의과대학 신경외과 의사였습니다. 돌도 지나지 않은 딸의 아빠인데, 전이성 폐암에 걸렸습니다. 다음은 지난 4월 '떠나기 전에'라는 제목으로 그가 남긴 글입니다.

선배들은 '우선 빨리 하는 걸 배워라. 훌륭하게 하는 건 나중에 배워도 된다'고 가르친다. 모두의 눈은 시계에 가 있다. 얼마나 마취 상태에 있었는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신경·근육이 손상되거나 신부전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오늘은 몇 시에 병원에서 나갈 수 있을까' 전전긍긍한다. 시간과 다툴 때는 토끼와 거북이, 두 방법이 있다. 토끼는 서두르다 보니 실수를 한다. 수술 절개 지점을 1㎝만 달리했어도 좋았을 것이라고 뒤늦게 후회하기도 한다. 거북이는 두 번 가늠하고 한 번만 절개해 실수는 적지만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6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런데 체중 감소, 열, 수면 중 식은땀, 끊임없는 요통 등 한 무리의 증상이 나타났다. 폐암이었다. 레지던트 과정을 겨우 마쳤지만, 화학요법을 받으며 오랜 기간 입원을 견뎌야 했다.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다. 시간이 멈춰 선 것처럼 느껴진다. 수술실에선 그리도 정신없이 돌아가더니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됐다. 퇴원 며칠 후 딸이 태어났다. 하루하루가 나를 죽음에 더 가까이 떠민다. 달리다가 지쳐버린 토끼… 누구나 유한성(有限性)에 굴복하게 된다. 야심이란 것은 성취되거나 버려진다. 어느 쪽이든 모두 과거에 속하게 된다. 돈, 지위, 모든 허영은 바람을 좇는 것처럼 허망하다.

딸이 나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니 한마디만 녀석에게 남기련다. '네 인생에서 너 자신에 대해 설명해야 할 순간이 있을 때,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했으며, 세상에 어떤 의미였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돼 다오.'

   

나는 닥터 폴 캘러너시보다 30년은 더 살았고, 내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 자기 몫을 하고 있기에 어린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괴로움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삶이 세상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면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라도 좀 더 진지하고 충실하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경복고, 연세의대 졸업. 미국 보스톤 의대에서 유전학을 연구했다. 순천향의대 조교수, 연세의대 외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서 연세필 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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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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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구 (222.XXX.XXX.197)
우연히 접하게 된 글,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유한성에 굴복하게 된다. 야심이란 것은 성취되거나 버려진다.
어느쪽이든 모두 과거에 속하게 된다"
여운이 길게 남는 구절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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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9 09:5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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