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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의 기다림, 사할린 동포
박대문 2015년 09월 14일 (월) 02:25:27
기다림은 그리움입니다. 가슴에 젖어드는 설렘과 아련함에 가슴 졸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냥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여야 한다면 기다림은 그리움이 아니라 가슴에 앙금으로 가라앉아 쌓여만 가는 한이 되고 잔인한 고문과 같은 형벌이 됩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분단 70년을 되돌아보며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고 선진 한국, 통일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을 자축하고 전 세계에 알리는 국민화합 대축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70년의 긴 세월을 내 나라, 조국 대한민국을 애타게 찾으며 못 잊어 하면서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우리 동포가 있으니 바로 사할린 한인 동포들입니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기다림에 지쳐 이제는 원망스럽고 한 맺힌 야속한 조국으로 인식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하게도 사할린 우리 동포들의 삶에 얽힌 애환과 질곡의 일부를 알게 되고 큰 충격을 받으면서부터입니다.

지난달 동호인 일행이 우리 식물도감에 기재되어 있는 우리 풀꽃이지만 북한에서 자라기에 만나볼 수 없는 북방계 식물을 찾아 사할린 식물 탐방길에 나섰습니다. 이것 또한 분단 70년의 결과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역사와 문화탐방이 아닌 식물탐사를 목적으로 왔기에 별생각 없이 사할린에 들어왔고 저녁 식사 겸 구경 삼아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 들렀다가 가족과 고향과 조국을 잃은 사할린 징용광부들의 처절한 삶과 소망, 후손들의 생활상을 일부 듣게 되었습니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 앞마당에는 한국과 사할린 민간단체의 힘으로 세워진 세 개의 비석이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할린 희생사망동포 위령탑’이고, 나머지는 ‘사할린 이중징용광부를 위한 비’와 ‘사할린 한인 이중징용광부 피해자 추모비’였습니다. ‘이중징용광부’? 들어 보지 못한 낯선 단어였습니다. '이중징용광부'란 전쟁의 막바지에 미군의 공습이 강화되어 사할린에서 생산한 석탄을 본토로 운송하는 화물선 운항이 어렵게 되자 일제가 급기야 1944년 8월 25일부터 사할린의 탄광 문을 닫고 여기서 일하던 조선인 노무자 3천여 명을 영문도 모른 채 배를 타게 한 후에 삼엄한 감시 속에 일본 본토에 있는 탄광으로 끌고 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리게 했던 광부를 말합니다. 이들은 한 번은 사할린으로, 또 한 번은 일본 본토로 두 번이나 강제 징용을 당한 것입니다. 금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시마섬’, ‘군함도'라고도 하고 '지옥섬'으로도 불리는 이 섬도 이중징용광부가 강제노역했던 탄광 중의 하나인데 이 섬의 노역 상황이 가장 처참했다고 합니다.

한인 문화센터 앞마당에 세워진 이중징용광부를 위한 비(碑)들에 실린 비문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한국에서 사할린으로 강제 연행되면서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사할린에서 본토로 강제 연행되면서 처, 자식과 영문도 모른 채 또 생이별한 이중징용광부들, 사할린의 처자식과 헤어져 일본 본토로 끌려간 이들은 작업 현장에서 이름 없이 죽어 나가고 원폭 투하로 전쟁이 끝나면서 뿔뿔이 헤어지고 소식이 끊겨 아직도 정확한 피해 인원과 행방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다 합니다.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는 일본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것인데 1925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에 급증했다고 합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일본인, 한인들을 사할린에 이주시켜 땅을 개척시키고, 탄광업과 목재업, 어업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기 위하여 한반도에서 많은 청년을 모집, 관(官) 알선, 징용의 형태로 이주시켰으며 특히 전쟁 말기에는 징용이란 강제 수단을 써서 동원하였습니다. 모집, 알선으로 간 사람일지라도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이주라서 자유의사가 통하지 않은 강제적 이주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현재 주민의 대부분은 러시아인(78%)이며, 한국인은 소수민족 중 최대(6.5%)로 약 4만 3,000명이 살고 있으며, 한인 1세와 그 후손 가운데 귀환을 바라는 사람은 7,000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한인문화센터 앞마당 비와 달리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에는 ‘망향의 언덕’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륙만리 이국에서 전쟁이 끝나자 고향 잃고 고국 잃은 채 전쟁 기간에 겪은 강제 노역과 멸시, 천대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다 생을 마감한 한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배 모양의 위령탑입니다. 이 위령탑 바닥에는 아래 비문이 씌어 있습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 이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 배는 오지 않아 하릴없이 빈손 들고 /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남으로써 대한민국은 해방되었고 멀리 사할린에 끌려간 동포들은 바라고 바라던 귀향의 때가 왔다고 믿었으며. 패전국으로서 전범의 국민인 일본인들보다 앞서 고향으로 돌아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6년 ‘미소 귀환협정’으로 일본인 30만 명의 귀국이 개시되었고 다음 해 1947년 여름에 중국인(대만인)도 조국이 보낸 귀환선을 타고 모두 돌아갔으나 먼저 귀국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던 사할린 한인 귀국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습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서 귀국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소련과 국교가 없고 반공 이념에 몰입된 대한민국은 이들을 찾을 여건과 경황이 없었고 강제로 끌어간 일본은 나 몰라라 팽개쳤습니다. 일본으로부터 사할린을 양도받아 노동력이 필요한 소련은 한인의 억류가 필요한 상황이라서 이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버림받은 국적 미아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할린 한인들은 오직 일시적인 체류일 뿐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가리라 굳게 믿고 기다린 지 70년! 하지만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일부 귀국한 동포라 하더라도 1945.8.15. 이후 출생한 자녀들은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살 날 몇 년 남지 않은 70 넘은 노인들만이 귀국하였으니 살아갈 방도도 막막하고 두고 온 사할린의 자식들과도 또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되어 또다시 이별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이별 속 삶으로 한 생을 마쳐야만 하는 이 세상의 이방인이 되어버린 한 맺힌 삶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의 한 맺힌 삶의 응어리를 누가 무엇으로 풀어 줄 것이며 사할린 한인 동포들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어찌 달래며 모국의 사랑과 관심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 것인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70년의 길고 긴 기다림과 메아리 없는 모국의 외면으로 현지 사할린 한인 동포의 아픔과 기대는 세월 속에 묻혀가고 일본은 이들의 기록과 사실을 공개하지 않아 이제는 징용으로 끌려간 후손 한인 동포와 대륙에서 건너온 고려인, 일본에서 건너온 한인들이 뒤섞여 필요에 따라 징용으로 끌려온 사할린 한인 동포 신분으로 자처하는 등 가닥을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당당하고 힘센 국가가 되어 국위를 선양하고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는 선진 한국이 되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일뿐이라고 봅니다.

이중징용광부들이 가장 처참하게 죽어간 역사적 사실이 있는 섬, 하시마섬을 금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유네스코의 하는 꼴을 보면 과연 UN 산하 국제사회기구도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의로운 조직이요 믿을 수 있는 국제기구라 할 수 있겠는가? 우선 일본이라는 국력으로 정의를 밀어붙이고 역사적 사실을 말살하는 작금의 작태를 보면서 양국 간 우열의 차이를 보는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약자로서의 피해자 입장에서 지난날의 아픔과 상처를 드러내며 ‘과거를 사죄하라!’,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등 억지 춘향 격 사과 요구와 과거의 수난사를 들춰내는데 집착하기보다는 국력을 한데 모아 막강 국가가 되어 대륙의 문화 전래와 독립운동의 당당한 역사를 바탕으로 저들의 비행과 만행을 질책하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지난 역사와 정권의 업적과 잘한 점은 무시, 폄하하고 흉과 허물만 침소봉대하여 파헤치고 들춰내는 쌈박질로 국력만 낭비하는 정치권, 사회권 모두가 심기일전하여야 합니다. 똘똘 뭉쳐 강하고 위상 높고 부유한 국가를 이룩하여 해외에서 원귀 되어 떠도는 불쌍한 우리 동포의 한을 풀고 그들 후손의 설움과 한을 달래줄 날이 언제나 올까? 그곳에서 비명횡사한 동포의 한을 누가 달래 줄 것이며 생사의 흔적조차 모르는 그 후손의 마음을 누가 어루만져 줄 것인가?
‘아! 사할린’을 절규하며 이들의 한을 달래 봅니다.




아! 사할린

그 누가 알랴?
가족 떠난 외로움을
고향 잃은 서글픔을
국적 잃은 참담함을.
수륙만리 이국 하늘 사할린 해변에서
고국 하늘 바라보며 바람처럼 스러져 간
임들의 슬픈 행로를 그 누가 알랴!

망망대해 수평선 너머
가물거리며 나타날 듯한 까만 배 한 척
행여 고국 가자!
날 찾는 귀국선인가?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사그라진 외로운 넋들이여!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애타 죽은 가엾은 넋들이여!

한 맺힌 그리움은 세월 갈수록 짙어만 가고
보고픈 부모 형제는 밤낮으로 눈앞에 어른대는데
70년을 기다려 온 한 맺힌 응어리
백 년 안에 스러지는 짧은 생이지만
천 년 가고 만 년 간들 그 응어리 풀리리오.

한 서리고, 쌓이고, 맺혀만 가는
아! 사할린.
칠흑의 차가운 밤하늘을
갈 곳 잃어 떠도는 영령(英靈)이여!
창공에 빛나는 별빛 되소서.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 되소서.

그리하여
별빛으로 오소서.
구름으로 오소서.
꿈에도 잊지 못했던
임의 고향 하늘에
아! 사할린의 임들이여!

(2015. 8월 사할린 에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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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권 (124.XXX.XXX.180)
우리 조상님들,
왜 그리 비참하였는지요
참으로 가슴 답답하고 울분이 쌓이는군요.
다 내 탓입니다.
내가 약해서 그리고 조선이 약해서 이렇게 된거지요.
한국은 강해져야 합니다.
한국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스스로 강하게 개척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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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3 14: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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