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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중년 가을철 레시피
신아연 2015년 09월 17일 (목) 03:35:56
아무리 모국이라 해도 돌아온 처지가 처지인지라 2년 전 ‘난민 신세’로 한국에 왔을 때 지인들은 각자의 ‘방서’를 제게 권했습니다.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독거 중년 레시피’라고 할까요?^^

그중에는 ‘치즈, 바나나, 초콜릿’을 상비하라는 아주 구체적인 ‘약방문’을 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저를 진심으로 아끼고 본인 또한 가족 간의 별리의 아픔을 겪은 분이라 충고를 귓등으로 흘리지 않았기에 지금껏 제가 기억하고 있을 테지요. 독수공방의 설움을 야식으로 달래라는 단순한 뜻이었다면 ‘배달의 민족, 야식공화국’에서 치즈, 바나나, 초콜릿은 아무래도 좀 궁색스럽습니다. 그분이 유독 그 세 가지를 권했던 것은 야식 목적이 아니라 우울증 방지에 효과적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본인도 그 세 가지를 늘 곁에 두고 사신다고 했습니다.

치즈, 바나나, 초콜릿이 우울증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건 알았건,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내 삶에 끈적한 늪이나 수렁처럼 질척일지도 모를 우울증에 대한 괴이쩍은 '혐의'가 그분의 처방으로 인해 “우울증 몇 년 형에 처한다”는 확정적 '선고'처럼 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수인생활을 막 시작하는 죄수가 휴지, 치약 등 감방에서 쓸 개인물품을 지급받는 중에 그 세 가지도 들어있더라고 해야 할지. 허걱!

때맞춰 “가정이 깨졌으니 너는 이제부터 가방을 걸머지고 도서관에나 다니라"는 친구의 말은 도서관이 순식간에 ‘형무소’로 인식되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50평생 우울증 '전과'가 없었다는 것이 ‘정상 참작’ 되어 ‘우울증 집행유예’ 상태에서 지금껏 삶을 지탱해가고 있습니다.

우울증은 마음과 정신에 거풍이 지속적으로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인 물에 이끼가 끼다가 종당엔 썩어 버리듯이, 흐르지 않고 막힌 생각과 감정이 똬리를 틀도록 방치되면 그것이 곧 우울증으로 나타나는 거겠지요.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변화의 물살에 자신을 유연하게 띄우지 못하기 때문이며, 변하지 않는 단 한 가지는 ‘모든 것이 변화해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건만 과거에 매여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 탓입니다.

그 지인뿐 아니라 최근에 우연히 만난 같은 처지의 대학 선배는 남편과 헤어진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원망과 분노와 회한과 자책이 수그러지기는커녕 해를 거듭할수록 차곡차곡 쌓여 거의 ‘수미산’ 수준이었습니다. 하도 억울해 하다보니 이제는 몸에 깊은 병마가 잠식했다며 저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것까지는 참아줄 수 있었지만 제 상태를 지레짐작하며 예의 본인의 ‘처방전’을 써 주려는 것만큼은 사양했습니다. 그분의 마음 또한 지난 10년 동안 볕을 쬐고 거풍된 적 없는 굳고 눅진하고 곰팡이 슨 상태라는 것이 딱할 뿐이었습니다.

동양 철학자 박희채 저 <장자의 생명적 사유>에는 “누가 나를 이렇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다. 부모인들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랐겠는가?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줌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줌이 없으니 하늘과 땅인들 어찌 사사로이 나를 가난하게 하겠는가? 그래서 나를 이렇게 만든 존재를 찾아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운명일 것이다.” 라는 ‘장자 대종사’에 나오는 내용이 풀이되어 있습니다.

장자가 언급한 ‘운명’이란 일어난 일에 대해 집착과 편견을 버리고 마음의 속박을 벗어 자유롭고 평화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여는 아이러니한 단초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누가 나더러 이렇게 파경에 이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이 지경이 된 것도 아니라면, 역설적으로 말해 그러니 이대로 자유롭고, 평화롭고 나아가 지금 상황 속에서 행복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요.

관계가 깨졌다고 해서 마음의 평화마저 깨지도록 해서는 안 될 터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거의 박살내거나 아니면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는 반년 전부터 한 수련 공동체의 10여 명 도반들과 꾸준히 마음 공부를 하면서 내면이 습해질 때마다 거풍을 하여 고슬고슬, 습습하게 하는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매사 변화를 온전히 수용할 줄 안다면 삶의 질곡과 저항이 덜할 것입니다. 소소한 신변의 변화에서부터 생이 죽음으로 화하는 궁극적 양태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만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매 순간 평화롭고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이 그러하듯이요.

이미 가을에게 천지를 내어준 여름과,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 앞에서 선뜻 물러갈 가을을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의 어떠한 변화도 자연의 이치를 따라 여여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천지에 거풍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무엇보다 변화된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우울한 것들을 보송보송 말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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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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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9.XXX.XXX.41)
어떤 연유로 지금 홀로 산다 해도 결국 누구나 애초에 홀로였던 것은 같습니다.

저도 혼자 된지 24년 되었지만 그 전 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생전에 주사가 있었다거나, 노름벽이 있었다거나, 폭력적이었다거나 뭐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고 저 자신이 태생적으로 독립심이(?) 강하기에 아마도 이런 형편에 그 덕을 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흘러간 노래 처럼* 누구나 홀로 왔다가 혼자 떠나는것* 을 다시 한 번 새기고 용감하게 전진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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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7 21: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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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220.XXX.XXX.246)
하하하~~
우울증을 집행유예시켜버렸으니 우울증이란 놈은 꼼짝 못하겠군요!
다수라는 외피로 불합리성을 합리화하려는 무모함 앞에서 다수인 너희들의 선택이 틀렸다고 얘기하고 그 단체의 장에서 내려 왔습니다.
호기롭게 단죄하던 그들이 오히려 아파하며 칭얼댑니다~
작은 실수를 보듬으면 덕이고 내치면 큰 허물과 아픔이 된다는 것을 이제라도 깨닫고 먼저 자신을 볼 수 있었음 좋겠는데 아직도 자신은 보지않고 타인의 허물만 집어내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비적대적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설정한데서 꼬이기 시작했는데 대상을 완전히 제압하는게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우울증의 노예가 되지 않을런지 걱정입니다. 이 맑고 푸른 가을하늘 아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우울증에서 자유이니 구조악이 아닌 인간적 실수와 잘 못에 대해선 더 크게 안아버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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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04: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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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골 (222.XXX.XXX.106)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깊은 뜻이 !!!

작가님께서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간들이 있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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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9: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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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 (222.XXX.XXX.106)
인생 뭐 있나요? 그렇게 그렇게 흘러가는거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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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9: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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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맨 (222.XXX.XXX.106)
치즈,바나나,초콜릿이 필요한 세상이기도합니다. "변화의 물살에 자신을 유연하게 띄우지못함" 문구가 크게 와 닿습니다. 흘러 흘러 저희도 늙어가네요. ㅎㅎ 어떤 여배우의 말처럼 주름살 하나 하나가 그냥 쉽게 생긴게 아니라고 자랑거리라고 하면 거의 우기는 수준이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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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9: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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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 (211.XXX.XXX.207)
강하고 담대하게 지혜롭게 살아가는 님에게 박수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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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21: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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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 (59.XXX.XXX.90)
좋은 말씀, 옳은 말씀입니다.
쉬운 말로 '매사 마음먹기 달려있지요.'
세상을 다스리기보다 마음을 다스리기가 그리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참 지혜롭게 잘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글로 새겨지니 더욱 아름답기도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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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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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풀 (121.XXX.XXX.189)
우울을 보송보송하게 말릴 수 있는 '거풍'의 처방법...
눈에 번쩍 뜨이는 삶의 지혜, 감사한 마음으로 덥석 집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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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4: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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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da (211.XXX.XXX.167)
한국인에게 면면히 흐르는 선비정신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그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도도한 고고함을 잃지 않는 신 작가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신 작가님의 글을 읽다보면 칼럼이라는 느낌보다는 순수문학 작품을 읽는 착각에 빠집니다. 마치 김유정의 단편소설을 읽은 후의 느낌이네요. 나만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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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1: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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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11.XXX.XXX.207)
다다님, 더더 칭찬해 주시옵소서! ㅎㅎ

저는 '고래'는 아니지만 칭찬에는, 특히 꼭 듣고 싶은 말을 들었을 땐 거의 황홀경에 빠집니다.^^ 어쩔 수 없이 윤회의 굴레바퀴에 있는 이유겠지요 ㅜㅜ.

칭찬에도 비난에도 여여하지 못한 못난 사람이기에 이런저런 조건 따라 일희일비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불멸의 명작들은 '지독한' 윤회의 산물이자 어리석은 고뇌의 토사물 같은 것이기에 저 또한 별 수 없는 한 인간임을 인정합니다. 언감생심 차라리 더욱 더 그렇게되어 저도 '작품'이라는 것을 한번 남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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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4: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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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112.XXX.XXX.25)
혼합까지는 하시는데 화합까진 못하시는 거 같으네요. ㅎ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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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09: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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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11.XXX.XXX.207)
무슨 뜻인지요?... 혼합과 화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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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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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112.XXX.XXX.25)
변화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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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08: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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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근 (203.XXX.XXX.41)
우울증이 아무나 걸리나요.
우울증걸렸다고 생각한다면 걸린거겠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우울증 안걸립니다.
스트레스를 글로 쏟아 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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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09: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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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11.XXX.XXX.207)
제게 확실한 처방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울증이란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을 낯설게, 소외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의 자기가 원래 자기가 아니라는 생각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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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4: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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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일 (1.XXX.XXX.140)
좋은 글, 오랜만에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읽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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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08: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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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11.XXX.XXX.207)
고맙습니다. 자연의 원리를 삶 속에서 발견하는 지혜를 배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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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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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현 (211.XXX.XXX.63)
마음과 생각과 논리를 자연스레 재미있게 표현해주셔서 좋습니다. 그것들을 모두 다시 근원적으로 생각하고 오랫동안 동일한 주제로 선인들도 그랬던 것처럼 지우고 또 세우는 과정이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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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08: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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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211.XXX.XXX.207)
몸이 소우주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저 지적으로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 깨닫습니다. 자연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이란 걸 제가 겪은 일상의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세심하게 제 마음을 읽은 듯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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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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