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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과 달팽이
임철순 2006년 09월 29일 (금) 00:00:00
<임철순칼럼>의 제목을 오늘부터 <임철순의 한 입 편지>로 바꾸고자 합니다. 한국일보에 격주로 쓰고 있는 글의 제목이 임철순칼럼이어서 그 글과 이 곳에 싣는 글을 구분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한 입에 먹고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 부담없고 가벼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세번째 이유로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정직한 글을 쓰겠다는 다짐입니다.

한 입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린 딸에게 먹을 것을 사 준 아빠가 “한 입만” 하다가 거의 다 먹어 버려 아이를 울리는 정겨운 모습도 생각나는데, 이 글이 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한 입만이라도 정답게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넝쿨과 달팽이

서울지하철 5호선 고덕역, 5번 출입구의 계단 위에는 넝쿨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가로세로로 줄이 매어져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이 계단을 오르다 보면 철 따라 인근 숲의 아카시아나 밤꽃향기가 바람에 쏴아쏴아 밀려오곤 했는데, 요즘은 꽃냄새가 없는 대신 수세미넝쿨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그 수세미넝쿨은 3개월 전부터 출입구의 좌우에서 벋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무성하게 자라서 계단 위의 하늘을 거의 덮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양쪽에서 줄을 타고 자라 오른 수세미는 드디어 중앙 부분에서 서로 만나 다소 억세고 넓은 잎 사이로 노란 꽃을 피워냈고, 언제 수세미를 따라 자라났는지 나팔꽃까지 분홍과 보라가 섞인 꽃을 온 힘을 다해 피워냈습니다. 누가 이것들을 심었는지, 누가 줄을 매 놓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걸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 넝쿨식물들은 오랜 기다림과 팔 뻗음 끝에 서로 만나 반갑고 좋아서 바람에 하늘거리며 시시덕거리고 서로 껴안고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바람에 시달리고 부대껴 울며 불며 흐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땅바닥으로 벋거나 다른 것에 감겨 오르는 식물의 줄기-이것이 곧 넝쿨인데, 넝쿨식물의 숙명은 무엇인가를 타고 오르거나 벋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고 오르고 벋어나가서 그들은 결국 만났습니다.

이런 식물의 안타까운 사랑과 그 한결같은 기다림을 지켜보다가 김광규의 시 <달팽이의 사랑>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장독대 앞뜰/이끼 낀 시멘트 바닥에서/달팽이 두 마리/얼굴 비비고 있다//요란한 천둥 번개/장대 같은 빗줄기 뚫고/여기까지 기어오는데/얼마나 오래 걸렸을까//멀리서 그리움에 몸이 달아/그들은 아마 뛰어왔을 것이다/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부르며/움직이지 않는 속도로/숨가쁘게 달려와 그들은/이제 몸을 맞대고/기나긴 사랑을 속삭인다//짤막한 사랑 담아둘/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하여/십 년을 바둥거린 나에게/날 때부터 집을 가진/달팽이의 사랑은/얼마나 멀고 긴 것일까//

마지막 연은 달리 바꾸어 쓰고 싶은 생각도 들긴 하지만, 어쨌든 그 느리고 작은 달팽이가 그리움에 몸이 달아 뛰어왔다니, 들리지 않는 이름 서로 불렀다니 시인의 눈이 놀랍지 않습니까. 달팽이는 느린 것, 그렇지만 한결같은 것, 자기 집을 가지고 다니는 것, 그 집은 곧 자기의 짐과 같은 것-이런 이미지에 사랑이 겹친 것이지요.
그러나 유하의 시 <느린 달팽이의 사랑>에 나타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달팽이가 기어간다/지나는 새가 전해 준/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그가 잘 알기 때문//느린 열정 느린 사랑/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방 하나 갖고 있는 건/평생을 가도/멀고 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달팽이의 고독을/그가 잘 알기 때문// .

달팽이는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할까요? 그래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당연히 더 많을 것입니다. 서로 만나 포옹하고 있는 넝쿨식물들 사이에 어느새 기어 올라간 달팽이 한 쌍이 이 밤에도 사랑을 나누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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