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가까이 지내던 육친(肉親)이나 친구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인물의 타계(他界)는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제 경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수상,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천수(天壽)를 다한 지난주의 서거도, 고인과의 개인적인 추억의 상실감 등으로 당분간 머릿속이 빈 것같이 허전할 것입니다.

40여 년 동안, 외신기자로 일하면서 가까이서 취재한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두 중심인물이, 수년 전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이은 김영삼 씨의 타계로, 이제 완전히 제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착잡한 생각이 오갑니다.

반세기에 가까운 기자생활 동안, 4·19 학생혁명부터 김영삼 문민정부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권의 부침(浮沈)을 목격하였습니다. 국내 언론사와는 달리, 거의 혼자서 정치에서 스포츠까지 다루어야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취재생활 중, DJ YS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 취재가 역시 가장 힘들었으나 보람도 있었습니다.

한동안 한국 정계의 주인공이었던 ‘양김(兩金)’ 씨의 본격적 취재를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정치가 시작되기 전의 1960년대 말, 소위 ‘40대 기수(旗手)’론이 정계에 선풍을 일으켰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철승 씨를 포함한 소위 ‘삼김(三金)’에 대한 활발한 취재가 외신기자클럽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71년 5월의 대통령 선거에 이은 박 대통령의 유신헌법과 계엄령 선포, 1973년 8월의 김대중 납치사건 등 파란만장한 정계 흐름이 외신을 더욱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국내 언론이 정부의 심한 검열로 많이 위축된 당시 사정 때문입니다.

김대중 씨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발한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에 의한 구속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내란음모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미국 등 우방의 항의로 가석방되었다가, 1982년 12월에는 자의 반 타의 반 미국망명 길에 올랐습니다. 이때부터 국내 민주화운동의 주역을 YS가 혼자 맡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유신 암흑시대에 박정희 독재정권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무모한 외신 탄압을 실행에 옮겨, 전 세계 자유언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관되었다는 허무맹랑한 혐의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세계 5대 언론사의 한국인 대표가 합동수사부에 감금돼 조사를 받는, 우리나라 언론사에 전례가 없는 사건이 5·18 사태 두 달 후 벌어졌습니다. 물론 계엄령 하의 국내 언론은 보도를 하지 못했으나, 이 사건은 외신 본사의 항의와 기사로 신군부의 언론 정책에 심각한 경종(警鍾)을 울렸습니다.

한국전쟁 휴전 얼마 후까지 서울에 상주하던 외국인 기자는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수하고, 한국인 기자들만이 외신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도쿄에서 응원·취재팀을 서울로 급파하는 것이 각사의 관행이었습니다.

이 사태에 연루된 회사는 미국의 AP통신과 뉴욕타임스, 영국의 로이터통신, 일본의 아사히신문과 공영 방송사 NHK의 5사였으며, 이 중 필자의 소속사인 AP의 반응이 가장 심각했습니다. 한국인 지국장을 군부 탄압으로 희생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외국인 지국장의 서울 상주를 추진한 것입니다. 정부의 간접적인 만류에도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서울지국 한국인 직원의 추천을 받아 상주 외국인 지국장으로 임명 된 사람은 도쿄총국의 편집장으로 있다가 은퇴 준비 차 하와이지국으로 자청해서 막 부임한 에드 화이트(Ed White)였습니다. 그는 4·19 이후 한국 취재를 많이 했고, 베트남에 근무 할 때 베트남전을 취재하는 한국 종군기자들에 많은 도움을 준, 한국을 잘 아는 언론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자 신청서를 정부는 1년 넘게 보류했다가 미국 대사관 중재로 겨우 받아들였습니다. 온화한 인품으로 한국을 제 나라처럼 사랑한 이 미국 기자의 상주 활동을 정부 당국이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유 하나는 이 친구가 YS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983년 5월 18일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 유명한 23일간의 단식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단식은 외신과 야당의 전단지에서만 보도되고, 군부의 검열을 받는 국내 언론은 그저 ‘현안 문제’ 또는 ‘재야인사 문제’ 등 애매한 제목의 일단기사로만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상도동 공보비서를 통해 수시로 연락을 받던 AP사무실에 어느 날, 손명순 여사의 비명에 가까운 긴급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무척 겁에 질린 듯한 어조의 손 여사 전화는 단식 중인 YS를 정부 측 인사들이 어디론지 강제로 옮겨갔다고 했습니다. 얼마 뒤에, 정부 측 인사가 YS를 서울대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는 전화가 다시 걸려왔습니다. 이 연락을 받고 화이트 씨는 경찰이 한국인 기자의 병실 출입을 막을지도 모른다고, 자기가 직접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리하여, 병원으로 끌려와서도 단식 중단을 거절하는 YS의 새로운 소식이 김천길 사진기자의 사진과 함께 크게 전 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얼마 뒤 가택연금이 풀리고 체력이 회복된 YS와 우리 세 사람의 거의 정기적인 비밀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인터뷰라기보다 시국에 관한 YS와의 의견 교환이었습니다.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이 결성되어 바쁜 정치활동을 계속하는 YS였지만, 한 달에 한 번꼴의 이 비밀 모임은, 당시 필동에 있던 남산 숲속의 식당 ‘외교클럽’에서 어김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 YS는, 시민의 성원을 등에 업은 민주화운동은 “멀지않아 꼭 성공한다”고 낙관적인 전망을 처음부터 역설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저 기다려 보라”고 미소 짓기만 했습니다. 화이트 씨는 군금해하면서도 집요하게 추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뿐 아니라 민주화 시위대 앞줄에서 행진하다 최루가스로 저지당해 경찰 ‘닭장’차로 호송될 때의 분노로 얼굴을 붉힌 YS, 1987년 대통령 선거유세 도중 광주에서 관중의 투석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쳐, 섬진강 휴게소까지 승용차로 한숨에 탈출하여 “여기까지는 안 쫓아오겠지”하며 안도의 숨을 쉬던 YS, 1993년 대통령 취임식에서의 만족스러운 그의 얼굴 등, 그의 파란 많은 정치 일생의 여러 모습이 그의 서거와 더불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습니다.

김영상 정부 출범 시,, 화이트 씨는 월남 출신 아내와 함께 하와이에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청와대 정원에서의 외신 기자들과의 모임에서 만난 YS에게 화이트 씨 딸 결혼식이 곧 있다는 얘기를 필자가 하자, “아 그 화이트 씨!” 하고 반갑게 회상하며 비서에게 결혼선물을 꼭 보내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화이트 씨도 3년 전에 타계했습니다. AP에서 은퇴한 뒤에도, 88 서울 올림픽 때와 그 뒤 다시 한 번, 우리 정부 요청으로 단기간 일한 적이 있습니다. “또 일거리가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전화 걸 때마다 웃으며 말하던 그도, 하늘나라에서 YS와 반갑게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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