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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표’ 쌀밥
이정원 2015년 12월 25일 (금) 05:23:38

“할머니, 이 밥 할머니가 지으신 거예요?”
“응, 근데 왜?”
“맛있어서요.”
 
어제저녁 5시 반경 아내와 15살 된 큰손자가 주고받은 식탁 위 대화 내용입니다.
아내가 손자한테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응, 그게요… 도우미 할머니가 차려준 밥보다 맛이 있어서요.”
 
아들네가 어제저녁부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함께 임시 기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같은 동의 1층 집을 샀는데 새로 수리를 해서 들어오려고 한 2주 동안을 우리 집에서 같이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제가 그 첫날이었고 아내는 묵은 밥이 있는데도 일부러 아들네 식구가 먹을 밥을 새로 지었습니다. 손자는 학원을 가야 하기 때문에 혼자서 먼저 밥을 먹게 되었고 아내는 밥 먹는 손자 모습을 보려고 옆에서 턱을 괴고 앉아서 지켜보다가 "밥이 맛있다"는 손자의 칭찬을 듣게 된 것입니다. 
  
아들 내외는 맞벌이를 하는 대학 교수입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집안 살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도우미를 쓰고 있습니다. 오후 3시경 출근하는 도우미 할머니가 집안 청소와 빨래 등을 하다가 저녁때 하교한 두 손자들에게 학원에 가기 전 5시 반쯤 새로 밥을 지어 먹이면 아이들은 허겁지겁 밥 한술을 뜨고 학원으로 갑니다. 똑같이 새로 지은 쌀밥을 먹었는데 할머니가 지은 쌀밥이라고 특히 맛있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도 큰손자는 오랜만에 할머니가 직접 지어주는 쌀밥을 먹다 보니 평소 먹던 밥맛과 다른 맛을 느꼈음에 틀림없습니다. 할머니 손맛이 밴 정성스러운 밥맛에다가 할머니가 쏟는 가없는 손자 사랑을 함께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쌀밥의 느낌을 제 할머니에게 말한 것이겠지요. 예부터 김장 맛, 장맛은 여인의 ‘손맛’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충남의 한 깡촌에서 나고 자라 중·고등학교 시절에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50년대 시절이니 1인당 국민소득 60불도 채 안 되는 가난 속에서 자라야 했고, 누구나 그랬듯이 여름철에는 꽁보리밥을 먹고 가을이나 되어야 귀한 쌀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가을철이면 꿈속에서도 쌀밥 먹는 꿈을 꿀 정도였고 일요일 날 누렇게 익은 벼 사이로 메뚜기를 잡으러 뛰어다니면 곧 먹게 될 쌀밥 생각에 꿀꺽 침을 삼키곤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어려웠던 시절에는 벼 익는 소리가 꿈결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바심하는 날 햇살로 지은 고봉밥을 눈앞에 두면 좌르르 기름기 흐르는 고슬고슬한 쌀밥에 뱃속에 있던 회가 동할 지경이었습니다. 다른 반찬이 없어도 간장이나 고추장에 쓱싹 비벼 먹으면 밥 한 그릇을 더 얹은 듯이 수북했던 고봉밥이 게 눈 감추듯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임금님 표 여주 쌀이니, 김포 쌀, 담양 쌀, 김제 쌀, 오대산 쌀 등 전국적으로 입맛 나는 유명한 쌀을 골라 사서 먹을 정도지만 그 당시에는 쌀에도 이름이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아니 없었던 듯싶습니다. 다만 찹쌀과 멥쌀의 구분이 있었을 뿐입니다. 쌀이면 다 똑같은 줄 알았던 시절이었고, 또 설령 그런 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걸 골라 먹을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쌀밥이면 최고의 밥이었습니다. 아니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을 만큼 농촌 살림은 어려웠습니다. 오죽하면 5·16 군사 쿠데타의 혁명공약(포고문) 네 번째에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구호가 들어갔겠습니까? “배가 고프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하는 요즘 아이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어렸을 적 우리들 모습입니다.
 
손자는 갓 지은 더운밥을 먹으며 오랜만에 색다른 밥맛을 느꼈고, 아내는 어려서 쌀밥을 먹던 동심으로 돌아가 옛날을 회상하는 동상이몽을 꾸면서 둘은 ‘맛’이라는 공통인수가 딱 맞아 떨어져 거기에 취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맛’이란 때와 장소와 뱃속 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마련입니다. 특히 세대에 따라 느끼는 맛은 달라서 커피를 마시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우리가 어려서 어머니가 내어주시던 식혜 맛을 알 리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쌀밥이지만 우리는 어려서 배불리 먹는 게 목표였지만 요즘 아이들은 끼니를 때우는 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밥이 아니더라도 빵이나 피자, 과일 같은 먹거리가 풍성한 요즘에 쌀밥을 맛을 보며 먹는 아이들은 드물 것입니다.
 
손자는 쌀밥이란 늘 그러려니 하다가 모처럼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머니가 차려주는,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긴 색다른 밥맛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내는 생전 처음으로 귀여운 손자가 맛있게 밥을 먹으며 ‘할머니 표’ 쌀밥에 신기함을 느끼는 모습에서 갓난아이 때 기저귀를 갈아주던 ‘귀여운 내 새끼’의 정을 오랜만에 떠올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큰손자는 며느리가 박사과정을 밟던 4년 동안 우리 집에서 데려다 키우며 할머니로서의 정을 쏟은 애라 그 정이 남다릅니다. 그러기에 저처럼 “손자가 머무르는 동안에는 매일 할미의 사랑이 담긴 갓 지은 밥으로 저녁을 차려주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는가 봅니다.
 
점심에 맛있는 거 뭐 좀 시켜 먹자고 했더니 밥통에 남아 있는 밥을 먹어 치워야 한다고 달달 긁어 공기에 채워 주는 아내에게서 가없는 할머니의 손자 사랑을 엿보았습니다. 그동안 떨어져 살면서 못해준 할머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베풀려는 듯싶습니다. 2주일 동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손주 목으로 밥 넘어가는 소리’라던 평소의 지론을 실천으로 보여줄지 곁에서 두고 볼 일입니다.


이정원
시조시인. 1939년 충남 예산 출생. 고려대 경제학과 졸업. 고대신문 편집국장 역임. 공직에서 정년퇴임. 2005년 계간 ‘현대시조’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한국시조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 강남지부 회원. 현대시조 ‘좋은작품상’ 등 수상. 시조집으로 ‘얼레와 어금니’ 등 3권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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