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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힘에 기대어
임철순 2016년 01월 01일 (금) 02:21:43

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막 떠나보낸 을미년을 돌아보니 한 해 동안 잘도 많은 글을 써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게 됩니다. 내용이나 수준은 둘째 치고 그렇게 쓸 수 있는 건강과 기회가 주어진 것이 우선 고맙습니다. 글을 쓰면서, 마시는 것도 크게 부족하지 않게 알아서 잘 마시고 살았으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주 오래전, 문학에 뜻을 두었던 젊은 시절에는 ‘글은 대체 왜 쓰는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을 주절거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쓰는 것은 문학적인 글도 아니고 아주 아닌 것도 아닌 얼치기입니다. 글 쓰는 거 말고 다른 재주도 없긴 합니다. 그래서 허위허위 시난고난, 끈질기게 쓰고 있습니다.
 
쓴 것을 되돌아보고 다시 훑어보니 그 많은 글 중에서 오롯이 나의 언어인 것이 거의 없다는 데 놀라게 됩니다. 어디선가 끌어와 베껴 먹고, 다시 우려먹고, 크게 튀겨 먹은 게 대부분입니다. 지난해 소설가 신경숙 씨의 표절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불거졌지만, 크고 작은 표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 문제는 혼성모방이니 패러디니 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지식재산이나 저작권에 대한 인식과 보호/준수 개념이 부족합니다. 이론으로 잘 아는 사람들도 말과 실제가 달라 실망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글을 쓰면서 이와 같은 문제들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해 동안 쓴 글을 들척이며 인용과 표절의 차이를 재보고, 베끼기 혐의가 있는 대목들을 스스로 점검했습니다.  
 
그렇게 세밑을 맞는 동안 여러 사람이 책을 보내왔습니다. 한 해를 보내기 전에 뭔가 매듭을 짓고 정리하려는 마음에서 책을 낸 것으로 보입니다. 주로 에세이집인 책들을 펼쳐보며 많은 말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2015년 마지막으로 12월 30일에 받은 정진홍 울산대 석좌교수의 ‘짧은 느낌, 긴 사색’이라는 저서는 그야말로 긴 생각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특히 글쓰기 자체를 이야기한 프롤로그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요약할 자신은 없지만, 짧은 글이 환영받는 시대에 긴 글을 쓰는 괴로움과 그 의미에 대해서 정 교수는 아주 긴 글을 썼습니다. ‘왜 이렇게 길게 썼을까, 좀 간략하게 이야기하시지’ 하면서 읽었지만, 그분의 집필 의도는 바로 그것, ‘만연체(蔓衍體) 긴 글을 쓰고 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에서 핵심적인 문장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분명히 짧은 글은 무릇 어질고 착하고 지혜로운 분[賢者]의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낡은 투로 말한다면, 그 글은 아무래도 모르는 것이 많아 끝없이 묻고 깊이 살펴 알고자 하는 사람[學者]의 몫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 교수의 결론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니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하기보다 그분의 말을 본받아 아래와 같은 게 아닐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게 좋겠습니다. ‘긴 글을 읽으면서도 느낌이 간헐적으로 튀어 행간을 메우고, 짧은 글을 읽으면서도 그것이 낳는 끝없는 사색의 가닥들을 놓치지 않는 경험이 내 삶을 채우고 이끌어갈 수 있어야 비로소 긴 글과 짧은 글이 빚는 갈등에서 우리는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책의 제목 ‘짧은 느낌, 긴 사색’의 고갱이인 것 같습니다. 긴 글과 짧은 글의 갈등이 긴 글과 짧은 글의 조화로 바뀔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그런데 나는 글을 많이 쓰면서도 긴 글과 짧은 글의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정한 분량으로 제한된 글을 마감시간 이내에 쓰는 데 익숙해져 주로 짧은 글을 써왔습니다. 읽기 쉽고 간명하게, 한 글자라도 더 절약하면서 쓰는 것만을 미덕으로 생각해온 것이지요.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 몰라도 새해에는 나도 제법 긴 글을 쓰고 싶어집니다. 그러려면 내 숨이 길어져야 되겠지요. SNS상의 댓글과 분량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내용에서 댓글 수준과 다름없는 짧은 글에 혹하고 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됐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른 재주도 없으니 다만 성실하고 근면하게 글을 쓰면서 되도록 깊고 넓게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해놓고 보니 ‘근면 자조 협동’을 내세웠던 새마을운동 구호나 어느 학교의 교훈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글을 통하여, 글과 함께, 글 안에서, 글의 힘에 기대어 살고자 합니다. 이 대목은 천주교 미사의 ‘마침 영광송’을 베껴 먹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제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해피 뉴 이어 인사를 드립니다. 이 해피 뉴 이어는 어느 목사님이 말한 대로 Happy New Year가 아니라 Happy New Ear입니다. 내 멋대로 해석하면, 남의 말과 시대의 언어를 경청하는 귀, 그리고 즐겁고 복된 뉴스를 많이 들어서 담는 귀를 말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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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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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흠 (175.XXX.XXX.151)
임선생님 좋은글 기대합니다.
글속에서 희망을 찾을수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HAPPY NEW 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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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2 07:13:45
0 0
dada (211.XXX.XXX.141)
임철순 님은 글을 참 매끄럽게 잘 쓰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글이 그랬고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몇번을 읽어보아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무슨 말인가요?
혹시 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오해를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올해에도 건강하신 가운데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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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4 10: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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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121.XXX.XXX.123)
고등학교 1학년 작문 시간에 '주제 불투명'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지적해주신 선생님 생각이 나는군요.
용서해 드릴 게 어디 있습니까? 제가 문제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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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4 16: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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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구 (119.XXX.XXX.7)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건강하셔서 건필, 건주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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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2 1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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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20.XXX.XXX.8)
건주가 참 문제입니다.건필은 원래 한계가 있으니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되지만, 건주는 노력하면 향상된다는 맹신과 미망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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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2 19: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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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112.XXX.XXX.25)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새해엔 좀 더 읽고 좀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읽는 세상에서 보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거 같아 글도 일종의그림으로 보는경향이 있는 거 같습니다. 하물며 쓰는 거는 더 어렵고 드문 경우 아닐까요. 자유칼럼 새해 첫 글이 <글의 힘>에 관한 글이 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하고 감히 유추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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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18:56:05
0 0
임철순 (220.XXX.XXX.8)
감사합니다. 새해 첫날 나가는 글이어서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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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2 19: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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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식 (123.XXX.XXX.38)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글의 가치는 결국 같다는 생각입니다. 글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치와 공감대에 의해 평가되어야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가 될 텐데요, 그렇게 보면 길고 짧은 것을 놓고 고민한다는 것은 글의 분량보다는 이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는 데 필요한 그릇은 얼마 만한 크기면 좋를까 하는 문제 즉 그 내용에 어울리는 그릇의 크기를 정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라 할 것입니다. 주제 넘은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만, 임주필님의 글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지금 그대로의 주필님의 글도 개성이 돋보이는 너무 좋은 글이라, 변신과 변화는 추구해야겠지만 그 개성을 강화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 말씀 드려본 것입니다. 되도 않는 얘기 용서하시고, 丙申年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시고, 문운이 왕성하게 뻗어나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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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12: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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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20.XXX.XXX.8)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시나 하이쿠처럼 짧으면서도 깊고 넓고 긴 생각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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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14: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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