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흰 구름 걸려 있는 산
임철순 2006년 10월 19일 (목) 00:00:00
#1=대학을 마친 후 근 40년 동안 여러분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애호와 우대를 받아왔습니다. 참으로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이제 퇴임인사를 드리면서 앞으로도 여러분과의 따뜻한 접촉, 교섭이 그대로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안녕하십시오.

#2=뒤돌아 보니 지나간 시간이 짧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오랫동안 공직을 맡아 오면서 제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한 듯 하여 앞으로는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흰 구름 걸려 있는 산에도 올라가면서 만나보고 싶은 분들과 더불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3=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직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굽이굽이마다 <목민심서>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만 하며 지나온 것 같아 회한만 남습니다. 그 동안 보내주신 성원과 격려는 늘 저와 저희 가족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고마움을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최근에 받은 세 통의 편지입니다. 앞의 두 통은 정년과 임기 만료를 맞은 대학 총장들이 보낸 것이며 세번째는 퇴임 후 법무법인에서 일하게 된 고위 세무공무원의 인사장입니다. 세번째 편지는 경우가 좀 다르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를 떠나 새로운 삶을 설계해야 하는 사람들의 착잡한 마음이 잘 담겨 있습니다.

나이가 들거나 조직의 여건이 바뀌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고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은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 분야에 몸 담아온 사람들이, 누구보다 더 그 분야에 익숙하고 정통한 전문가들이 일을 접고 자리를 내 주는 것은 상실감과 공허감, 허무감을 느끼게 되는 일입니다.

남들은 “그만하면 됐지 더 이상 바랄 게 있을까” 하고 부러워하거나, 고위 공무원들을 옷 벗긴 청와대 인사수석의 명언처럼 “그 분들은 할 만큼 한 분들”이라고 쉽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무나 그런 자리까지 올라가는 게 아니므로 먹을 것도 충분할 테니 은퇴 자체를 큰 명예로 알고 삶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나라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 위에, 다 펼치지 못한 포부가 여전히 남아 있고, 얼마든지 일을 더할 수 있는 건강과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과 자리를 떠나야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쉽게 납득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가 存亡之秋의 IMF시대에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된 뒤, “하나님이 나를 이 때 쓰시려고 그랬나 보다”는 말로 세 번이나 낙선했던 시련과 고통을 회고했습니다. 그도 세번째 낙선을 하고 망명하듯 외국으로 나갈 때 全琫準의 절명시를 인용해 자신의 마음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時來天地階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愛國丹心誰有知(때를 만나서는 천지가 내 뜻과 같더니 운이 다하매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랴. 나라 사랑의 붉은 마음 그 누가 알리)

물러나는 사람들은 자칫 이 ‘英雄不自謀’의 억울한 감회와, 내 운이 다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실제로 자타가 납득할 수 없는 은퇴, 실제로는 명예롭지 못한 명예퇴직, 정해진 임기도 채우지 못하는 불의의 인사사고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국 물러나게 됐다면 생각과 언행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배운 명문 <페이터의 산문>에는 ‘아직 5막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이란 무대에서는 때때로 3막으로 연극이 끝나는 수도 있다. 그러니 가라, 기꺼이 무대를 물러나라. 너의 역할을 중지시키는 것 또한 어떤 큰 선의의 명령일지도 모르니까’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물러남의 의미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는 대세의 균형을 이루며 지키는 바둑, 지키는 야구/축구를 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애써 쌓은 명성과 업적에 흠이 생기고 금이 갑니다. 조지훈의 <지조론>에는 “속담에 말하기를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 하였으니 참으로 명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후반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서울 잠실의 석촌호에는 언제나 노인들이 많이 나와서 걷거나 또래 노인들과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아파트에서 내려다 보는 무상감과 달리 호수의 물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안정감을 갖게 되나 봅니다. 그런데 이 노인들에게는 언제나 한결같이 앉는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남들이 멋 모르고 아무 벤치나 차지하면 안 됩니다.

나이든 분들은 왜 그렇게 자기 자리를 고집할까요? 버스를 타더라도 꼭 앉으려 하는 자리가 따로 있을 만큼 노인들은 대개 붙박이가 되고 싶어 합니다. 석촌호 주변의 벤치도 개인이 소유하거나 점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공공의 자산인데도 노인들은 자기 자리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리를 고집하는 삶이 직장이나 조직생활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자리는 물려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물러나는 연습을 미리미리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흰 구름이 허허롭고 자유롭게, 텅 빈 듯 가득 차게 걸린 그런 산과 계곡의 閑裕하고 淸冽한 모습을 생각하면서 물러나는 연습을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