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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권태익 2007년 11월 08일 (목) 10:58:55
UCLA서 영문학 명강의로 존경 받고 있는 박 교수는 부인과 함께 한인타운에 있는 교회에 가려고 2번 프리웨이 남쪽 방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남부 캘리포니아는 겨울이 우기입니다. 작열하는 태양빛에 인고의 세월을 보낸 산천초목들은 이 때 단비에 젖어 비로소 생기를 되찾습니다. 갈색 또는 황금빛으로 변했던 산야의 풀밭은 경탄 할 만큼 푸르러지고, 뿌리를 깊게 내려 최소한도의 수분을 빨아올리며 연명하는 사막성 사철나무도 이레를 굶고 생일날 잘 먹는다는 식으로 물잔치를 합니다.

‘항상 더운 지대’라는 말을 귀에 담고 와서, 산 지가 오래 안 되는 이주민들은 과연 겨울도 되게 덥구나 하며 주체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스웨터나 모피코트를 보고는 "어디다 쓴담?" 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동분서주하는 시절이 지나다 보면, ‘사는 곳이 고향’이라는 말이 있듯, 갈수록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간밤의 폭우가 먼 고산 등성이에는 하얀 눈으로 내려, 청명하게 개인 날씨에 장엄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제법 쌀쌀해진 바깥공기를 가르며 그들의 차도 제한속도를 넘어 ‘흐름대로’ 씽씽 달렸습니다. 평소에도 이 짧은 구간은 신통하게 정체가 없는 곳인데 더군다나 일요일 아침이 아니냐. 성능 좋고 안락한 렉서스 차 안 CD에서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4계는 나이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무디어만 가는 그들의 정서를 조금은 회복시켜 주는 듯하고…

이 때 경찰차가 나타나 오른 쪽 레인과 왼 쪽 레인 사이를 지그재그로 가면서 뒤 따라 오는 차들을 제압했습니다. 박 교수는 미국에 산 지 30년 넘었지만 이런 상황을 목격하기는 이번이 딱 두 번 째입니다. 먼저 번에도 참 기이하다고 여기며 서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윽고 차량충돌 사고현장까지 당도해서야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박교수가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저 경찰차가 왜 저러는지 알겠소?”
“글쎄요. 왜 그러지요?”
“앞에 차 사고가 있어서 통제하는 겁니다요. 큰 사고라면 ‘올스톱’할 수도 있으니, 도중에 일반도로로 가야 할 지 모르겠네.” 박 교수가 노우하우나 되는 듯 뻐기는 투로 말했습니다. 전체 차의 속도가 현저하게 줄기는 했으나 아직 딱 멈춰 서서 주차장 꼴이 되지는 않는 게 다행이었습니다.

“조금 더 가면 분명히 사고현장이 나올거야.”
그러나 산을 낀 큰 커브를 돌아갔는데도 어떤 문제도 없이 말짱했습니다. 경찰차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잖아요.” 부인의 핀잔에 그는 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 내가 착각했는가 봐. 사고가 안 났어도 모든 차들이 속도를 너무 내면 감속하도록 경찰차가 저런다는 걸, 또 한 가지 알았구먼.”

착각! 그렇습니다. 착각은 크게는 패가망신하기 십상이지만, 상황에 따라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적지 않습니다. 이날도 일단 착각을 했지만 한편 생각하면 ‘하나는 알아도 둘은 모르는 수가 많다. 섣불리 아는 사람이 더 큰 소리를 낸다’는 교훈을 다시 일깨워준다는 점이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하겠다고 억지로 갖다 붙여 봅니다.

박 교수가 한국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일이었습니다. 그가 이성에 대한 연모를 눈 뜨게 만든 한 예쁘디 예쁜, 그리고 갓 찍어낸 동전처럼 새뜻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의 사춘기는 대뜸 첫사랑과 함께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여학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일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일찌감치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여중 3년생인 이 소녀는 그 보다 한 살 연상밖에 안 되었지만 노상 누나라고 부르라고 하며 특별히 이성으로 의식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이 여학생에게 어필할 방도가 없을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과목 전반의 성적은 별로이면서 수학이면 수학, 국어면 국어, 영어면 영어식으로 한 가지만 파고들어 특출한 성적을 올리는 학생이 있습니다. 그의 올인 과목은 영어였습니다. 그는 영어교과서를 사면, 대학노트 5~6권을 철해서 거기다 등사체같은 깨끗한 글씨로 본문을 전부 쓰고, 해석도 다 적어 놓았습니다. 새 단어도 사전을 찾아 일목요연하게 챙기고, 문법과 영작 등 연습문제도 모조리 풀었습니다. 이를 보고 급우들은 물론이고 선생님조차 감탄을 금치못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학년초에 영어과목을 마스터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건방지게 타임이나 뉴스위크도 기를 쓰며 읽어보려고 했습니다. 어느날 그는 뉴스위크를 읽다가 오자라고 생각되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paranoid’가 그것이었는데 손에 잡히는 사전들을 찾아보아도 ‘paranoia=편집증만 있고 d자로 끝나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그는 d자는 비슷한 a자의 오식임을 100% 확신했습니다.

그 당시 타임이나 뉴스위크사는 오자를 한 자라도 발견하는 독자에게 고급 승용차를 현상금으로 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옳거니! 그는 이걸 타서 그 여학생에게 주어야겠다고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오자 내용을 적은 편지를 ‘작문’해서 매거진에 나와있는 일본 동경지사에 보내고, 그 여학생에게 “조금 있으면 대단한 선물을 안겨 줄께”라며 큰소리를 쳤습니다.

열흘이 가고 스무날이 가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희망이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한달이 지나 또 보름이 되어 절망감이 찾아들려 할 즈음 영문으로 된 편지봉투를 받았습니다. 뉴욕 록펠러 (라케퍼러가 맞는 발음임을 나중에 알았지만) 빌딩에 있는 뉴스위크 본사로부터 온 답장이었습니다. 동경지사가 아니라 뉴욕본사라... 이게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받은 편지에 일일이 답장해주는 성의가 고맙고 철저함에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기쁨에 복받쳐 폴짝폴짝 뛰었습니다. 설레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뜯어서 꺼내 본 편지의 내용은 독자가 되어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말 다음에 ‘paranoid’는 ‘paranoia’의 형용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청천의 벽력과도 같았습니다. 고급 세단도 날아가고 그 보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던 그 여학생도 날아가 버렸다는 생각으로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더 이상 그 여학생을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피해서 다니다가 어느날 길에서 딱 조우했습니다. 안색이 안 좋고 태도가 이상해졌는데 왜 그러느냐고 그 여학생이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답도 않고 도망치려고만 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더욱 궁금해져서 다그쳤습니다. “누나한테 말 못 할 일이 뭐가 있어? 함께 궁리해보면 풀릴 일인지 모르잖아?”
“그 누나란 소리 작작 해라.”
“좌우간, 이실직고해봐. 응? 착하지.”
그는 어설프게 알고 어리석게도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고 전제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실토했습니다.
그는 우거지상이 되어, “이젠 누나라는 말 하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겠고, 우리 학교 학생회장녀석과 친하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게 되었어. 이젠 끝이야.”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찬찬히 듣고 있던 그 여학생은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나서 그의 손을 꼭 잡고, “그래 그래, 알았다. 그까짓 고급차 준다 해도 내가 그걸 뭐에 쓰겠냐. 됐다 됐어. 이젠 누나라고 안 해도 용서해 줄께. 그런데 넌 너무 paranoid인가 뭔가 한 태도가 안 좋아. 영어만 하지 말고 딴 과목도 골고루 하고 문학같은 교양서적도 좀 읽어라.” 라며 타일렀습니다.
그는 뜻밖의, 꿈같은 전화위복의 급진전에 아찔하게 행복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래도 너에 대한 paranoia는 일생 버리지 못 할 것 같애.”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1년 앞서 졸업하고 기다리던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넉넉한 학비를 송금받지 못하는 처지에서는, 미국에 와서 힘 들고 고생스런 과정을 생략하라는 법은 없었습니다. 남편은 입학허가를 받은 UCLA 대학원에 등록했으며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대한항공 화물창고서 외롭게 야간 시큐리티 가드를 서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자기도 공부하고 싶어하는 바람을, ‘당분간’ 접어둘 수밖에 없겠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미안해 할까봐 아내가 그런 단서를 단다는 것을 속으로 잘 알았지만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의 직종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주 초년병의 일자리도 대개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아내는 노스리지서 드라이 클리너스의 자그마한 에이전시를 형편에 맞는 값에 사서, 운영하게 된 것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벤차를 끌고 와서 속칭 더블백(더플백이 맞는 말)이라고 하는 이민 보따리를 싣고, 미리 구해놓은 원 베드룸에 입주케 해준 친척의 세탁소서 일을 배운 것이 자영 스몰 비즈니스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처음엔 시행착오도 많았고 터무니 없는 컴플레인을 당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6.7도 지진의 진앙지로서 가게 안이 엉망이 되었고, 강도를 당한 위험한 순간까지 있었는데, 모든 것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나갔습니다. 아들딸들도 공부 잘 시키고 훌륭하게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냈습니다. 온 가족이 착실하게 산 덕분으로 형편이 점점 나아졌습니다. 적은 돈이나마 저금하고 때때로 우량주에 던져놓듯 투자도 한 것이 20수년이 되니까 몇 배가 늘어났습니다. 어떤 종목은 몇 십배까지 오른 것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풀이 우거진 지역인 라 카냐다에 저택은 아니라도 어지간한 집도 장만했습니다. 가족들은 차도 새 것으로 바꾸고 힘드는 일 제발 그만 두라고 해도 그녀는 막무가내 듣지를 않습니다. 처음엔 한인들이 선호했으며 이젠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미제 차종, 주행거리가 20만 마일을 넘긴 낡은 차를 지금까지 운전하고 다니며 부인은 열심히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싫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고 천직인양 종사해온 하찮은 비즈니스에 감사하며 힘이 있는 날까지 좀더 일을 계속하겠다고 합니다. 늘어난 선의의 단골들이 아깝고 그들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아직도 제대로 속력을 못 내는 차 안에서 박 교수는 말했습니다. “내가 차를 한 대 부인에게 선물하려고 하는데… 진짜 그럴 때가 되었어요.”
박 교수는 오래 전부터 이를 위해 따로 돈을 모아둔 것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사주고 싶은 차종은 벤츠라고 말했습니다. 최고급 반열에 드는 S500 정도까지 일시불 할 여유가 있으니 제발 거절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자기의 평생 소원 중의 하나라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의 인생의 의미가 하나 없어진다고도 했습니다.
“소년 시절의 그 paranoia가 다시 출몰하는 거야?”라며 부인이 웃었습니다.
“그렇게 해요. 오래 생각해볼 필요도 없어요. 당장 결정합시다.”라고 남편이 재촉했습니다.

그들의 차는 5번에 이어 110번 프리웨이로 갈아탄 뒤 5분정도만 있으면 올림픽가 출구에서 내릴 참이었습니다. 거기서 내리면 바로 한인타운이며 교회도 멀지 않습니다. 박 교수는 백인지역의 미국교회로 옮겨서 다니자고 말해본 적이 있지만, 부인은 고생하던 때 다니던 한인교회에 그대로 다니자고 해서 30년도 넘게 한 곳에 다닙니다.
“좋아요. 헌데, 조건이 하나 있어요. 차종은 내가 타고 싶은 걸로 사줘요.”
“음, 롤스 로이스나 람보기니를 사달라면 집을 팔아야 되겠네. 대관절, 무슨 차요?” 남편은 조크도 아닌 조크, 웃기지도 않는 싱거운 개그를 했습니다.
“현대 XG요.”
“안돼요. 더 고급차를 골라요.”
“내가 원하는 차를 안 사주면 딜은 무효에요. 먼저 한국에 갔을 때 타보니 국산차도 놀라울정도로 좋아졌습디다.”

박 교수는 살아오는 동안 웬만한 일은 거의 다 부인과 상의해 왔지만, 이번만은 깜짝쇼로 집 앞에다 가져다 놓고 이야기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습니다. 박 교수는 “맹목적 애국주의, 편협한 국수주의...” 어쩌고 논쟁을 해보았자 부인의 주장을 꺾지 못 할 노릇임이 뻔했습니다. 부인은 평소에도 “일본사람들은 패전 뒤 차만 해도 별로 좋지 않았던 자기네 차를 사서 타고 다니고, 그런 정신으로 경제를 부흥시켰지 않아요? 보세요, 한인들은 마켓에 온갖 일제상품을 진열해놓고 사주는데, 그들은 한국상품을 도무지 사주지 않잖아요.” 라는 말을 해오는 터였기에 말입니다.

프리웨이서 내려 교회까지 ‘로칼’로 가는 동안 박 교수는 눈 앞이 흐려졌지만, 체면상 손을 가져다 댈 수도 없어 한동안 운전하기에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권태익 : 전북일보 편집부 차장으로 근무할 당시 한국일보 기자시험을 치르고 입사, 편집부 평기자로서 언론계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부장대우로 일하다가 워싱턴지사에 파견되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LA미주본사 편집국장 대리, 편집 기획실장을 마지막으로 퇴사했다. 신문 편집에만 40여년을 종사했다. 
현재 장남이 경영하는 광고기획사 Saeshe의 고문 겸 카피라이터.
이메일 taeikw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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