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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古土 부여를 찾아
방석순 2016년 06월 21일 (화) 01:13:03

‘아득한 봄날에 동무들과/ 백제의 옛 서울 찾으니/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바람은 예대로 부누나’
북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6·25 난리 통에 피란 내려온 큰형님은 이따금 이런 노래를 혼자 부르곤 하셨습니다. 누구의 노래를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형님조차 기억을 못한다고 합니다. 어릴 적 들었던 그 노랫말이 지금껏 잊히지 않습니다. 조금 커서 학교에 다니면서 비로소 노랫가락이 엉뚱하게도 미국 노래 ‘산골짝의 등불(When It's Lamp Lighting Time in the Valley)’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희한하게도 우리 노랫말과 미국 노랫가락이 한 치 어김없이 잘 맞았습니다.
 
열흘 전 자유칼럼 필진들과 바로 그 백제의 옛 서울 부여를 찾았습니다. ‘부여(扶餘)’, 듣기만 해도 온갖 감상이 떠오르는 곳입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을 정작 제 발로 찾아온 건 처음입니다. 그래서 남다른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 한편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부여 읍내 곳곳에 백제 땅임을 알리는 간판들이 비쳤습니다. 부소산성(扶蘇山城) 기슭 식당 안에는 ‘환영 대백제국 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마침내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에 들어왔음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산성 솔숲 길에 시비(詩碑) 두 기가 나란히 서서 방문객을 맞았습니다. ‘낙화암(落花巖)’이라는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놓은 구절이 자못 비감했습니다.
‘백제 신민의 눈물 수건을 흠뻑 적셨겠지만/ 당당하고 충성스런 이 몇이나 될까?/ 만약 당시에 낙화암이 없었더라면/ 옛 나라 강산은 쓸쓸한 봄이겠지.(百濟臣民漏滿巾 堂堂忠義有何人 若無當世落花巖 古國江山寂寞春)’
 
‘부여’라는 제목을 붙인 또 하나의 시비가 저를 더욱 놀라게 했습니다. 바로 그 옛날 어릴 적 큰형님이 부르시던 바로 그 노랫말이었습니다. 

   

‘백마강 맑은 물 흐르는 곳/ 낙화암 절벽이 솟았는데/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길고 긴 원한을 멈췄으리’ 
이렇게 끝난 시의 작자는 아쉽게도 미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망국의 한을 안고 궁녀들이 꽃잎처럼 떨어져 내렸을 낙화암은 정말 백마강(白馬江)이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거기에 1929년 어느 시 모임에서 백제 여인들의 순절을 기려 지었다는 팔각정자 백화정(百花亭)이 있었습니다. 낙화암에서 물러나는 길목에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시비도 하나 서 있었습니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똑같이 망국의 한을 씹으며 애상에 젖었을 춘원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낙화암 절벽 아래 고란사(皐蘭寺) 선착장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백마강을 타고 내려가 구드래나루터에 이르렀습니다. 도성 한복판에 자리한 백제의 호국 사찰 정림사지(定林寺址)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웬걸, 그야말로 휑한 빈터에 탑 하나가 달랑 서 있을 뿐입니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이 땅에 시집온 백제의 문화관광해설사 오가야 마사코(鋸屋正子) 씨는 “정림사지야말로 백제 사찰의 정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 유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중문과 부처님의 사리나 불경을 모신 탑, 본존불을 모신 금당, 승려들을 교육하는 강당을 남북 자오선 상에 일치되게 배치하는 독특한 가람 구조가 일본에까지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표본이 유명한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라고 합니다.
 

   

그런 복잡한 설명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마음은 온통 1천 수백 여 년 홀로 절터를 지켜왔을 오층탑에만 쏠렸습니다. 알맞은 키의 각층 기단과 네 귀가 살짝 들린 지붕돌[屋蓋石]의 애교, 균형 잡힌 탑 전체의 모양이 아마도 백제 여인들의 소박한 맵시가 저렇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저렇듯 단아한 석탑을 두고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불국사 석가탑(釋迦塔)과 다보탑(多寶塔)만 읊어댄 것이 미안해졌습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탑으로 불리기 전 이 탑은 한동안 ‘평제탑(平濟塔)’이라는 오명(汚名)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백제 31대 의자왕(義慈王) 20년(660년) 나당 연합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한 전공을 탑신에다 새겨 넣었기 때문입니다. IS의 바빌로니아 유적 파괴를 연상케 하는 만행입니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 쓰인 기공문(紀功文)에는 나당 연합군의 부대총관(副大摠管)이던 신라 무열왕 김춘추(武烈王 金春秋)의 아들 김인문(金仁問)의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1942년 절터에서 고려 현종(顯宗) 때(1028년) 만들어진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이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음을 알게 되었답니다. 석탑도 오늘날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옛 백제 때의 이름이 정림사인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습니다. 백제의 슬픈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국보 9호로 지정된 높이 8.3m의 이 석탑은 국보 11호인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오늘도 묵묵히 백제 고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부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슴에 느껴지는 것이 더 많은 곳입니다.
 
서력기원 전후 위례성(慰禮城; 한강 유역)에서 개국한 백제는 고구려 세력에 밀려 475년 문주왕(文周王) 때 웅진(熊津; 公州)으로 천도했습니다. 538년 성왕(聖王)은 도읍을 다시 사비성(泗泌城)으로 옮겨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습니다. 건국 시조의 본향 ‘부여’(扶餘)를 상기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부름으로써 오늘날의 지명도 그렇게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00년 넘게 왕도로 융성했던 부여의 지금 모습은 영락한 시골일 뿐입니다. 봄가을로 일반 관광객은 물론 학생들의 수학여행으로 적잖게 붐빈다지만 읍내는 물론 주변에 변변한 숙박시설이 별로 없습니다. 유적지 가까운 모텔은 예약해 둔 방마저 제멋대로 다른 투숙객에 내어주고는 딴소리를 합니다. 청소도 하지 않은 방을 내주기도 합니다. 관광버스를 세울 만한 주차장이 별로 없습니다. 큰 차를 돌릴 만한 곳도 마땅찮습니다. 충청남도나 부여군이 백제의 역사를 알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성의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부여를 떠나기 직전 큰길가 고추밭에 물을 주는 아낙과 마주쳤습니다. 농사일에 대해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낯선 나그네를 안마당까지 불러들여 꽃처럼 예쁘게 달린 블루베리를 맘껏 따먹으라고 권합니다. 집도 예쁘고 키우는 꽃도 예뻤지만 아낙의 맘씨가 더 예뻤습니다. 고맙다 인사하며 또 오겠다 했더니 언제든 다시 오랍니다. 서산 마애불(瑞山 磨崖佛)처럼 화사하던 아낙의 미소가 그 후로도 자꾸 생각납니다. 다음엔 마애불을 찾아가 백제 미소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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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121.XXX.XXX.61)
부여 옆의 서천이 고향인 사람으로 부소산 낙화암 고란사는 몇번 갔었으나 정림사지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부끄러웠습니다. 부여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시골읍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이 관광인프라의 낙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해발 100미터 남짓의 부소산을 안고 있어 건축물의 고도제한이 엄격해 4층 이상은 못짓게 한다고 식당 주인은 푸념했습니다. 천도는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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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2 08:17:02
0 0
방석순 (210.XXX.XXX.82)
옛 역사 문화 유적지에 갈 때마다 느끼는 일입니다만 현지 주민 생활과 유적 관리정책에 충돌이 없지 않아 모두가 불편해 하는 듯했습니다.
유적의 중심 부분에서 좀 벗어난 지점에 주민들의 새로운 생활 공간을 마련해서 유적도 제대로 관리하고 주민 생활이나 외래 관광객의 숙식에도 불편이 없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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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2 13:13:11
0 0
연원인 (220.XXX.XXX.103)
가슴울리는 좋은 글 만납니다- 저도 옛백제지역 출신이거든요

경주등옛신라지역에서는 석굴암등 유형적인것들에서 느낀다면 부여등 백제지역에서는 인심,소박함등 무형적인 것들을 찾아 느끼면 좋겠네요.

컬럼보고 못된 숙박업소 정신차리길 바랍니다( 부여군청?에 칼럼전달은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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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2 02: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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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210.XXX.XXX.82)
요즘은 역사 유적지마다 전담 해설사가 있어
마치 그 시대를 재연하듯 설명해 주어서 참 좋았습니다.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 백제 문화와 오랜 관계를 가진 일본의 여성 해설사를 만나니 묘한 감흥이 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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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2 1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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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223.XXX.XXX.44)
나라 꼴은 한심하고
식자들은 한가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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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2 00:09:49
0 0
꼰남 (112.XXX.XXX.25)
옛터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그런가 봅니다.
글을 읽는동안 필자님 형님이 부른 노래는 잘 몰라도
<꿈꾸는 백마강> <백마강 탄식> 등이 계속 흥얼거려지는 거 있지요.
근데 부여가 백제의 수도였대서 백제에 한하여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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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11:12:18
0 0
방석순 (58.XXX.XXX.58)
부여에 사는 사람들과 과객의 감상이 같을 수야 없겠지요.
그래도 부여의 역사야 어디 가겠습니까?
애달픈 과거를 가졌지만 자랑할 것도 많으니 그야말로
두루 내보일 만한 역사의 고장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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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23:36:35
0 0
자작나무 (221.XXX.XXX.190)
깔끔하고 뜻 깊은 글, 잘 읽고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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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09: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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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58.XXX.XXX.58)
우리 땅 우리 역사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지내온 게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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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23: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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