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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광주리
임철순 2006년 11월 13일 (월) 00:00:00
올해 6월 대학서클 여자후배의 딸이 결혼하던 날, 서클회원 몇 명이 인근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자연히 30여년 전 학창시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암울했던 1970년대, 박정희정권 아래에서 이념서클이 겪었던 어려움과 각 개인의 고민 같은 것이 얼핏설핏 식탁 위를 오갔습니다. 나는 뒤늦게 합류한 지방대 철학과의 N교수에게, 그와 같은 학과 친구였던 C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하숙집에 매일같이 찾아오던 1973년인지 그 다음해인지 둘이서 내기바둑을 두었습니다. 그가 지면 술을 사고 내가 지면 <철학대사전>을 주기로 했는데, 느물느물 약을 올리는 그에게 나는 바둑을 졌고 눈물을 머금고 책을 내주었습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가 주신 책이었습니다. 식물생태학을 전공하는 대학교수가 왜 <철학대사전>을 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죽 했더니 N교수는 그 책을 자기가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철학과를 나왔지만 경영/무역을 공부하고 싶어 하던 C에게 무역대사전을 주고, 그 대신 이 책을 받았답니다. 대만 유학을 한 N교수는 그 책도 대만까지 다녀왔다고 하면서 “형님께 돌려 드리지요” 하더군요.

한 달쯤 뒤에 책이 왔습니다. 1963년 7월 학원사(대표 김익달) 발행. 정가 1,200원. 1,300 페이지가 넘습니다. 아버지(2004년 사망)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기로 책을 잃은 사실은 끝까지 모르셨지만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뒤 같은 서클의 등산모임에 갔을 때 30여년 만에 돌아온 책 이야기를 했더니 H라는 후배가 자기 책도 돌려 달라고 하더군요. 무슨 책? 아니, 그걸 잊어 버렸어요? <공자 맹자> 그 책 빌려갔잖아요? 그 때서야 나는 30년 넘게 가지고 있던 그의 책이 생각났습니다.

1972년 대양서적이 발행한 세계사상대전집(전 41권)의 제 2권. 정가 2,000원.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책꽂이에 꽂아두고 이따금 읽었던 책입니다.

한 열흘 지나서 퀵 서비스로 보내 주었습니다. 34년 만에 돌려 주면서 퀵 서비스라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인간은 결국 남에게 준 것은 잊지 않고 자신이 줄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N교수는 자신의 저서와 함께 내 책을 보내면서 한시 한 수를 붙였습니다. <通讀哲學大事典>이라는 제목의 그 시는 比量通讀千餘片 苦學正言紀念碑 指事象形如切琢 一文一句系眞知라고 돼 있었습니다. 철학대사전 천 여쪽을 비교하며 통독해 보니/힘써 공부하여 진리를 말한 사람들의 기념비로세/절차탁마하듯 철학의 개념을 만들었으니/하나 하나의 문구 참된 앎에 연계되었구나, 이런 뜻이랍니다. 2004년 1월에 동서비교철학 강의 준비를 위해 철학대사전을 100개 주요 개념어로 정리한 후 지은 시로 감사의 뜻을 대신한다고 했습니다.

그 시를 읽으면서, 무애 양주동의 <文酒半生記>가 생각났습니다. 이 유쾌한 책에는 노산 이은상과 저서를 주고 받으며 화답하는 시조가 나옵니다. 노산이 ‘이 골짝 저 골짝 뒤져 몇 뿌리나 더 캐었는지 일생을 산으로 다니며 삼 캐는 이도 있소구려’ 하는 시조를 보낸 데 대해 무애는 ‘젊어 각기 들메 메고 산으로 바다로 떠났것다 내사 산삼 캐려다가 도랒 몇 뿌리 얻었네만 어디 봐, 자네 광주리엔 구슬 몇 낱 빛나는가’라고 했지요. 도쿄의 추운 하숙방에서 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으며 문학의 꿈과 우정을 키웠던 젊은이들이 각기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뒤 상대의 광주리를 들여다 보며 칭찬하는 노래입니다.

N교수로부터 책과 시를 받았지만 나는 답례로 부쳐줄 책이 없었습니다. H에게도 잘 읽었다, 너무 오래 갖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말만 겨우 써 보냈습니다. 내 책을 30여년 동안 내주고 남의 책을 30여년 동안 지닌 채 산으로 바다로 떠나 살았던 이 긴 세월에 내 광주리에는 과연 무엇을 담았던가.

도라지도 산삼도 구슬도 없이 잡초같은 풀만 몇 포기 담긴 광주리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거둘 것 없는 중년의 텅 빈 들녘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쓸쓸한 기분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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