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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마주치는 국난의 역사
허영섭 2016년 11월 08일 (화) 03:18:31

강화도 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갑니다. 한 달이라고 해도 주말을 틈타 걷는 것인 만큼 기껏 서너 차례 출정에 불과합니다. 그동안 거주지인 고양시를 중심으로 파주, 김포 주변의 둘레길을 맴돌다가 모처럼 보폭을 바깥 지역으로 넓힌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내판이 세워진 나들길을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구간에 따라서는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다가도 호젓한 산길이나 논둑길로 접어들기도 합니다. 행선지를 미리 정해 놓기보다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재미가 더 쏠쏠한 법입니다.
 
이미 대여섯 해 전에도 한동안 강화도 길을 걸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나들길 코스 위주였지요. 코스별로 거리가 20km 안팎에 이르러 끝까지 완보하는 데만도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자유 코스로 택한 것이 그런 때문입니다. 운동 삼아 걸으면서도 쉬엄쉬엄 시골 풍경을 듬뿍 즐기겠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강화도 길을 걸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강화도에 국가 수난의 역사적인 자취가 유달리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 박물관'이라 부를 만합니다. 일찍이 고려왕조 당시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가 항전의 보루가 되었으며, 구한말에는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이 강화도를 교두보 삼아 조선 진출을 노리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남으로써 여러 차례 국난의 위기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지난 주말 걸었던 북문 코스의 고려궁터가 몽골 침략에 대항하던 궁궐 자리입니다. 고려 23대 임금인 고종 19년(1232년) 몽골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아예 개성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세웠다고 하지요. 그의 아들인 원종 11년(1270)에 이르러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무려 38년 동안 고려 왕실의 운명을 지켰던 자취입니다. 궁궐 주변에 성곽도 쌓았는데, 궁궐 북쪽에 위치한 성문이 바로 북문입니다.
 
그때 원종이 몽골에 굴복해 환도를 추진하자 이에 반발하는 삼별초 항쟁이 일어났다는 것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흔적이 멀리 완도와 제주도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현재 고려궁터에는 궁궐의 기단과 돌계단 정도만 남아 당시의 상황을 넌지시 말해 줄 뿐입니다. 요즘 가을철을 맞아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의 농염한 정취가 아마 그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병인양요(1866년) 때 수난을 당한 외규장각도 바로 여기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고려 시절 설치된 것은 아니고 조선 인조 임금 때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해 왕실의 중요 문서들을 약탈해갔던 것입니다. 현재 5년마다 대여 계약을 갱신하는 방법으로 조선왕실 의궤를 포함해 그때 약탈됐던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받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프랑스에 이어 미국 함대가 쳐들어온 신미양요(1871년)도 강화도를 무대로 벌어진 사태였습니다. 미국 함대가 한강으로 통하는 염하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우리 군사들과의 포격전이 불가피했고, 초지진과 광성진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됐던 것입니다. 강 건너 김포의 덕포진 진영에서도 포격에 나섰습니다. 결국 미국 함대는 철수하게 되었고, 이에 대원군이 쇄국정책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보다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일본이 요구하는 수호조약(1876년)을 억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될 줄을 상상조차 했을까요. 이미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뒤처졌고, 따라서 열강들 사이에 흥정 대상이 될 수밖에 없던 외톨이 신세였습니다. 그 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이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계기가 강화도에서 시작됐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요.
 
‘강화 도령’으로 알려진 철종 임금의 얘기도 구한말 당시 조정의 내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철종이 어렸을 때 살았다는 고려궁터 근방의 거처가 지금은 대궐로 꾸며져 ‘용흥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전등사와 마니산 참성단에 이르기까지 강화도 곳곳을 다시 차근차근 돌아보려 마음 먹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나라가 안팎으로 흔들리는 시절, 지난날의 역사에서 상당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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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우 (175.XXX.XXX.5)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도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많이 생기었다고 생각됩니다.
20년전에는 이런 문제가 닥치었으면 해결이 어려웠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이익이 무엇인지, 충분히 대한민국 국민은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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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8 16:15:24
0 0
꼰남 (220.XXX.XXX.208)
그러고 보니 강화도는 꼭 한반도의 축소판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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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8 09:36:15
0 0
자작나무 (221.XXX.XXX.190)
<고래 사이의 새우>란 제목을 접하면서,
나라 안팎에 닥친 시련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군요. <입맛에 맞는 역사>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지요.
답변달기
2016-11-08 08: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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