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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립스틱을 바른 조선 선비
이성낙 2016년 11월 11일 (금) 01:04:39
   

조선 시대 초상화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많은 문화 콘텐츠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쳇말로 스토리텔링감이 무궁무진하다고 할까요. 그것도 그러할 것이 조선 시대 여러 문화 장르 가운데 하나인 초상화처럼 500년 넘게 변함없이 지속성을 견지해온 예가 동양은 물론 세계 미술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조선 시대를 초상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필자는 조선 초상화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초상에 나타난 다양한 피부 병변에 대해 밝혀낸 바 있습니다. 안면에 다양한 점(母斑, 혹)이 있는 선비는 허다하고, 실명(失明)한 선비, 오늘날 의료 기술로도 치료하기 녹록지 않은 루푸스(Lupus)병으로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선비, 다모증(多毛症, Hypertrichosis) 때문에 얼굴이 온통 털(毛)로 뒤덮인 선비, 백반증(白斑症, Vitiligo)으로 고생하는 선비, 주량(酒量)과는 무관한주사비(딸기코)로 고생한 선비 등 증례가 즐비합니다.
 
그런 가운데 병적 증상은 아니지만 빨간 립스틱을 바른 듯 입술이 빨간 조선 선비의 초상화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초상화의 피사인, 주인공은 족자에서 방바닥에 앉은 자세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조선 시대 여느 초상화와 다르다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사진 1,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다시 말해 우리 초상화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 다른 부분이기도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초상이 그러하듯이 피사인이 방석에 앉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일본 초상화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조선 시대 초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점이 보였습니다. 한 가지는 조선 선비의 얼굴색을 단색인 흰색으로 처리한 것입니다. 일본 초상화가 그렇듯 얼굴을 흰색으로 처리하다 보니 흔히 보는 우리 초상화보다 훨씬 평면적으로 보였습니다. 특히 조선 초상화를 대표하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자화상(사진 자료 2, 해남 녹우당 소장)과 비교해 보면 안면을 연한 노란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색조의 강약을 통해 좀 더 입체적 느낌을 더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두 초상화의 입술 색이 완연히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결정적인 것은 선비의 입술이 생각보다 빨간 것입니다. 마치 립스틱을 바른 듯.
 
그래서 초상화의 주인공에 관심을 갖고 좀 더 깊이 살펴보았더니 안면을 흰색으로 처리하고 입술을 붉게 한 주인공은조태억(趙泰億, 1675~1728)이었습니다. 자는 대년(大年), 호는 겸재(謙齋)와 태록당(胎祿堂)을 썼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인물로, 저서로는 《겸재집(謙齋集)》을 펴낸 학식 높은 문신이었으며, 사후에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실로 걸출한 조선 후기 인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숙종(肅宗) 37년(1711), 조태억은 조선통신사절단 단장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그때 그의 모습을 일본 화가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가 그린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니 초상화의 입술이 빨간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왜 일본 초상화는 우리 것과 달리 얼굴은 하얗게, 입술은 붉게 그렸는지 의문이 듭니다. 동양 삼국의 초상화 연구로 저명한 조선미 교수는 일본 초상화는 “귀족은 서민과 달리 고매한 존재여서 품격 있는 얼굴 표정, ‘실눈과 매부리코(히키메 가기바나, 引目鉤鼻)’라는 얼굴 표현법, 즉 아랫볼이 불룩한 둥근 얼굴에 두꺼운 눈썹, 가늘게 일선으로 그려진 눈, ‘く’자 모양 코, 그리고 조그마한 주점(朱點)을 찍은 입으로 이루어진 얼굴 묘사법”에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 얼굴처럼 천태만상인 것이 없는데, 화가가 지침에 따라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을 알고 나면 빨간 립스틱을 바른 듯한 조태억 선비의 초상화를 이해하게 됩니다.
 
반면 우리 초상화가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정신을 초상화에 철저히 반영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숙종 14년(1688) 《승정원일기》에 “한 가닥의 털(一毛), 한 올의 머리카락(一髮)이라도 달리 그리면 아니 된다”라고 명쾌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문화가 있을 뿐, 좋거나 나쁜 문화는 없다(There are just different cultures. They are neither good nor bad ones)”라는 명문구를 생각하면서 일본이나 중국의 초상화가 지닌 미술사적 우열의 의미를 떠나, 우리 초상화는 그들의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을 다시 되새기게 됩니다.
 
그래서 필자는 조선 초상화에 담긴 조용하고도 깊은 선비 정신을 되새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아하지 않은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도 있는 그대로 그리게 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조금도 미화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그린 조선 초상화는 자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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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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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220.XXX.XXX.208)
일본 초상화 묘사법에 '입술은 붉게 그린(칠한)다'란 게 있다는 말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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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1 09: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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