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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쪽 눈만 뜨고 있나
정숭호 2017년 01월 23일 (월) 00:09:18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시 한 편이 있지요. 여러 번 원문을 찾았지만 시인의 이름과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실패. 하지만 ‘임팩트’가 강해서 내용은 머릿속에 남아 있네요.

‘몽골 사막 어딘가를 지나는데, 마을도 인적도 없고, 사방에 모래뿐인데, 갑자기 두 사내가 나타났네. 한 명은 뙤약볕 속에서 땀 뻘뻘 흘리며 모래를 파내 수로 같은 걸 만들고, 한 명은 그 옆 작은 트럭 작은 그늘 속에서 인부가 게으름 피우는지 감독하고 있구나! 일하는 사람에게 배려는 없고, 더운 날씨에 불만만 보이는 표정! 아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한 명이 일을 해도 감시·감독이 붙는 슬프고도 더러운 세상!’

틀릴 수도 있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산문(散文)으로 다시 작문한 탓에 산만하고 길어졌지, 원시(原詩)는 이보다 훨씬 짧고, (당연히) 훨씬 시적이었지요. 사막을 여행하다가 잠깐 스쳐 지나간 풍경에서 인생의 슬픈 본질을 찾아낸 시인의 감수성에 놀랐고, 몇 줄 안 되는 짧은 시행 안에 ‘지배와 피지배’ ‘감시와 피감시’라는 삶의 기본 구조를 압축해 담아낸 시인의 능력이 대단했습니다.

제 기억 한구석에 그렇게 웅크리고 있던 이 시는 건설회사 다니는 사위가 출근한 며칠 전 어느 휴일날, 3~4년 만에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평소에도 저녁이 별로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았던지라 집 나서는 사위에게 “휴일엔 쉬어야지. 무슨 직장이 그러냐”고 진심어린 위로를 했더니 “나가서 하청업체 일하는 거 지켜봐야 해요. 제가 직접 뭘 하는 건 아니고요”라는 대답이었지요. “다른 사람들도 나오냐? 현장 소장도 나오고?” “저 혼자만요. 공사 막판이라 인부도 한 명만 와요. 일 잘하는 사람이라 저도 안 나가도 되는데….”

그 다음 제 말은 제가 한 게 아니고 그 시가 한 것입니다. “감독하러 가는구나. 대충하고 일당만 받아갈까 봐. 그렇지? 공사 제대로 안 되면 준공 늦어지고, 원가 늘어나고…. 그래도 휴일이면 쉬어야지. 그 사람이나 너나 고생이다.” 하지만 사위의 대답은 시와는 달랐습니다. “아뇨, 감독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 일 제대로 안 하면 자기만 손해지요. 일한 만큼 돈 받으니까 더 열심히 하지요. 감독자가 없어도 현장은 돌아가요. 저는 혹시 빨리 일 마칠 생각에 무리하게 작업하다가 사고가 날까 봐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사고가 났는데 현장에 감독자가 없다면 우리만 혼나잖아요. 당국이나 언론이 우릴 그냥 두지 않을까 봐 나가는 거예요.”

몽골 사막 두 사내 중 한 명의 얼굴에 겹쳐진 사위의 얼굴. 표정이 무심했습니다. “아, 그렇겠구나. 누군가는 지켜봐야 하는구나. 감시가 아니구나.” 문을 열고 새벽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사위의 등 뒤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저는 ‘왜 사막의 그 사내를 악한 감시자로만, 갑과 을의 관계에서 야박한 갑이라고만, 뜯는 자와 뜯기는 자의 관계에서 악착 같이 뜯는 자로만 생각했을까, 내 시야는 왜 이리도 좁고 박해졌을까’라는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삶의 측면은 다양하기만 한데….

지하철 안에서 화장하는 여인들을 꾸짖는 칼럼을 읽으며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요. 필자가 남자인 이 칼럼은 “집에서는 뭐하고 복잡한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입을 뾰족 내밀고 립스틱을 바르느냐, 분첩으로 얼굴을 토닥이느냐. 조신한 여인네는 그러지 않는다”며 ‘지하철 화장녀’들의 ‘방정하지 못함’을 마구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한참 뒤 어느 중앙 일간지 여기자가 자기 칼럼에서 “나는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 맞벌이하면서 아이들 옷 입히고 밥 먹인 후 가방 챙겨 학교 보내고 후다닥 일터로 나가야 하는 모든 엄마들, 여성들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일 거다”라고 쓴 걸 읽고는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그 휴일 새벽에 사위와 말을 주고받으며 느꼈던 것이 이 여기자의 칼럼을 읽은 날에도 떠올랐다는 말입니다. 내 시야와 생각의 좁음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는 말입니다. 삶의 측면은 다양한데, 두 눈 가진 나는 한 눈으로만 세상을 봐왔구나, 내 삶만 생각해왔구나, 그동안 어떤 말, 어떤 글로 다른 이의 삶을 해(害)했는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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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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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모 (223.XXX.XXX.109)
눈이 하나 밖에 없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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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5 15:01:28
0 0
변우찬 (175.XXX.XXX.214)
늘 잘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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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17:25:29
0 0
11trout (123.XXX.XXX.200)
고맙고. 잘 지내시오? 새해 인사도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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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20:39:02
0 0
김종우 (121.XXX.XXX.50)
마음이 찡합니다. 나도 그랬구나 싶습니다. 속 좁은 생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 그대로 자기 생각만 하는 거죠. 눈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은 혼자 꾸려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요즘 촛불 맞불이 시끄럽습니다. 모두 극단으로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좋은 깨우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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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13:02:58
0 0
11trout (123.XXX.XXX.200)
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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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20:41:44
0 0
꼰남 (220.XXX.XXX.208)
외골수, 선입견, 고정관념, 이분법, 흑백논리, 아전인수, 견강부회...
역지사지로 풀며 삽시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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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12:00:04
0 0
11trout (123.XXX.XXX.200)
외골수, 선입견, 고정관념, 이분법, 흑백논리, 아전인수, 견강부회...
이게 전부 한 눈의 문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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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20:43:34
0 0
임정훈 (220.XXX.XXX.44)
저도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 제 기준에 따라 판단을 하는 제 자신을 관찰하게 되면,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봐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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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11:42:31
0 0
ehlsehf (113.XXX.XXX.197)
세상의 어떤 사람관계에도 인간성은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모두 상대적일 뿐이지요.
단지, 어떤 특정상황에서 우리가 비판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그 관계에 인간성- 즉, 사랑이나 공감이나 배려가 흐르고 있는가- 의 개재 여부일 것입니다.
지켜보는 자가, 지켜봄을 받는 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 시인이 관찰할 때, <지켜보는 자가 무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실>을 보고서 표현했으면 그것이 리얼리티이고,
사위께서 현장의 안전이나 감독의 의무를 지켜보는 것이 <관계에서의 책임>이었다면, 그 또한 삶의 리얼리티가 아니겠습니까?
글쓰신 이의 사위의 사례가 몽골의 시인이 바라본 리얼리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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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10:50:04
0 0
11trout (123.XXX.XXX.200)
좋은 말씀입니다. 주신 말씀 붙잡고 좀 더 생각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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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20:45:13
0 0
자작나무 (221.XXX.XXX.190)
두 눈 다 감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듯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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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08:18:58
0 0
11trout (123.XXX.XXX.200)
잘 계시지요? 두 눈 다 감고 사는 게 편해서 그러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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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20:46:5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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