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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변기’(1917)와 ‘슈즈트리’(2017) 사이의 100년
이성낙 2017년 06월 28일 (수) 09:28:25
   

지난 5월 20일 ‘서울로 7017’ 보행길이 개장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현장을 찾았습니다. 개장 한 달을 넘긴 ‘서울로 7017’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혼재합니다. ‘서울로 7017’의 다양한 볼거리 가운데서도 ‘슈즈트리(Shoes Tree)’라는 설치작품이 유독 사람들의 뭇매를 맞았습니다(사진 1).

필자가 언론매체에서 ‘슈즈트리’에 대하여 들었을 때는 부정적인 느낌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이 훨씬 강했습니다. 무엇보다 소재로 쓰인 ‘신발’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量)인 헌 신발 3만 켤레가 쓰였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신발 하나하나는 그 사람의 인생을 함축하는 한 권의 책과 같다.”는 황지해 작가 생각에 필자도 적극 동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오래전 정현(1956~)이라는 유명한 조각가와 옛 ‘철도 침목’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조각가 정현은 자신이 철도 침목을 쓰는 이유를 “‘철도 침목’ 위를 달린 객차에 수많은 사람의 다양한 사연이 깃들어 있어서”라고 하였습니다. 필자는 두 작가의 생각과 작품 소재로서의 ‘헌 신발’과 ‘헌 철도 침목’이 맥을 같이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시(詩)와도 같아서 보이지 않는 현상에 깊은 의미를 담아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작품 ‘슈즈트리(Shoes Tree)'는 높이 17m, 3만 켤레의 헌 신발이 나무 형태를 이루는 대형 조형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작품을 본 시민들의 호된 비판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작가는 결국 작품을 ‘철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작품에 대한 주된 비판은 “왜 하필이면 헌 신발이냐?” “산더미처럼 쌓인‘ 헌 신발’에서 악취가 난다.”는 점 외에도 “이게 무슨 예술품이냐?”, “왜 이런 곳에 아까운 세금을 써야 하나?” 등이었습니다.

슈즈트리에 대한 시민의 목소리에도 일견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한 발 뒤로 물러나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뉴욕 전시장에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작품 ‘화장실의 변기’(사진 2)가 작품명 ‘샘(Fountain)’으로 전시된 적이 있습니다. 뒤샹의 작품‘샘’도 전시장에서 철거당하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뒤, 미술 애호가들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예술품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작가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공감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술 평론가들은 작가의 ‘발상의 전환’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화장실 변기’는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해 줍니다. 바로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관용(Tolerance)'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음과 같은 언론보도가 뒷받침합니다.
   
“화장실 변기가 미술인이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지난달 29일 영국에서 열린 권위 있는 미술상인 ‘올해의 터너상’ 시상식장에 참석한 미술계 인사 500명에게 물은 결과, 현대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마르셀 뒤샹의 1917년 작 ‘샘’이 뽑혔다.
2위는 큐비즘(입체주의)을 연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차지했으니 대량 생산된 변기가 거장 피카소를 누른 셈이 되었다.” (정재숙, 《중앙일보》, 2004.12.3.)

서양 미술계는 물론 일반 시민사회가 직간접적으로 마르셀 뒤샹의 ‘발상의 전환’이 품고 있는 ‘관용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좀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아간 것이 아니냐는 데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화장실 변기’를 이용한 작품 ‘샘’을 둘러싼 메시지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마르셀 뒤샹의 ‘샘’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황지해 작가의 대형작품, 즉 헌 신발더미에서 악취가 난다는 이유로 철거를 주장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설치미술가 이불(李昢, 1964~)을 떠올립니다. 그녀가 1997년 세계 미술의 중심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부패하는 물고기를 전시하자, 철거되는 과정에서 예술성에 대한 논쟁이 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논쟁은 작가의 작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폐쇄된 전시공간에서 부패하는 생선이 풍기는 참을 수 없는 악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불 작가는 예술성을 인정받아 세계 미술계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이제는 세계적인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우리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는 황지해 작가의 ‘슈즈트리’에서 풍겼던 ‘악취’를 우리가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점에서 못내 아쉬움이 남습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의 ‘화장실 변기’와 2017년 황지해의 ‘슈즈트리’사이에 존재하는 100년의 세월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반추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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