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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이여, 왜 변하는가!
정숭호 2017년 07월 06일 (목) 00:38:09

한 여자아이가 하는 짓을 전해 듣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몇 살?” 누가 물으면 “일곱 살요”라고 대답하지만 아직 만 여섯도 안 됐습니다. 무슨 말, 무슨 짓을 해도 귀여울 때입니다. 얼마 전에는 설거지를 했답니다. 엄마가 끌어다 놓아준 식탁 의자 위에 올라서서 앞치마를 두른 채 접시와 그릇을 헹구는 모습이 나름 꼼꼼하고 야무집니다. 하지만 힘들고 불편한 듯 잔뜩 찌푸린 옆얼굴이 동영상에서 30여 초 계속 비칩니다.

“우리 어린이, 설거지 재미있어요?” 제 엄마가 동영상을 찍으며 묻습니다.
“재미있어서 하는 거 아녜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있습니다. 땀방울도 맺혔군요.
“그럼 왜 설거지하겠다고 그랬어? 엄마가 힘들다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꿈을 이루려면 어려운 것도 해내야 한다고 했어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고요.” 엄마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아이의 꿈은 요리사가 되는 겁니다.
“누가 그랬어요?”
“소렐 로렌슨이요.” 아이는 한참 빠져 있는 영국 만화에 나오는 속 깊은 아이 이름을 댔습니다.

이 아이, 이 귀엽고 똑똑한 것, 지금 세상에서 오직 착하고 예쁜 것만 빨아들이는 이 아이도 이제 금방 ‘미운 일곱 살’이 되고, ‘중 2’가 되어 저토록 사랑하는 엄마에게 대들고 아빠를 비웃으며, 북한의 김정은도 무서워하는 존재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초심은 왜 변하는지!

어깨가 아파 대학병원에 갔습니다. 여러 달 다녔던 동네 의원 의사가 이것저것 비싼 치료를 권하고 시술(施術)한 후에도 차도가 없자 “힘줄이 끊어진 것 같으니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라”고 해서 예약하고 찾아간 곳입니다. 아무리 새로 지은 곳이어도 병원 외래 대기실은 언제나 시장바닥처럼 번잡하고 시끄럽고 어수선합니다. 예약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갔는데 대기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여전히 제일 밑에 깔려 있었습니다.

오래 기다린 탓에 짜증이 쌓였지만 수련의의 친절한 인사 한마디로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연전(年前)에 맞이한 내 둘째 사위보다도 더 어려보이는 수련의는 나를 보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습니다. 동네에서는 내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해도 비슷한 답이 돌아올까 말까 했지요.

젊고 반듯한 이 의사의 친절에 고무되어 나는 준비한 것보다 증상을 더 소상히 말할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의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 이야기를 다 듣고는 또 뭘 물어보기도 하며 컴퓨터에 열심히 적어 넣었습니다. ‘다 압니다. 그러니 짧게 말해주세요’라는 기색이 언제나 역력한 동네 의사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외래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예약 시간을 못 맞추는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수련의니까, 배워야 하니까, 경험해야 하니까 환자를 오래 붙잡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젊고 잘생긴 의사의 친절이, 환자에게는 친절해야 한다는 마음이 개업의가 되고 유명의가 되면서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초심은 왜 변하는지!

구청 세무부서에 전화를 했습니다. “안 내도 될 세금이 부과된 것 같다”고 했더니 예쁘지만 또렷한 젊은 여자 목소리가 한두 가지를 묻고는 “확인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하고 끊었습니다. 30분쯤 뒤, 내 전화기에 ‘지방세 두 건 감면 조치됐습니다’라는문자가 떴습니다. 이 친절하고 신속한 문자 사이로 얼마 전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찾았던 주민센터의 민원 창구의 젊은 직원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9급 공무원 시험 경쟁률도 대단하다더니 똑똑한 청년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인물이 훤하고 끼끗, 깔끔합니다. 창구 앞에서 머뭇대는 노인들은 물론 까탈을 부리는 민원인들에게도 친절하고 재바르게 응대합니다.

젊은 공무원들을 보면서, 미안하게도, 지금은 순수하고, 봉사의식이 충만하지만 저들 중 몇 명은 언젠가는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괴언(怪言)과 함께 시민 위에 군림하고, 부정과 부패에 슬금슬금 물들 거라는 불길한 생각에 잠시 빠졌습니다. 초심은 왜 변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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