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칼럼 | 게스트칼럼
     
압존법(壓尊法)에 눌린 K를 구하다
노경아 2017년 08월 29일 (화) 00:03:33

“난 우리 애가 걷고 뛰는 것도 못 보면서 그 시간을 여기서(대한일보 스플래시팀) 보냈어. 내가 좋은 부모는 못 돼도, 부끄럽지 않은 부모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한테 동기를 줘.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을 거라는 확신. 나한텐 그게 동기다.”

생후 27개월 아이를 둔 일간지 사진기자 오유경의 말이 가슴으로 들립니다. 거대 비리 권력에 맞서 올바른 기사를 쓰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오 기자입니다. 두려움에 떠는 같은 팀의 후배에게 한 진솔한 말입니다. 드라마 ‘조작’입니다. 탄탄한 스토리와 배우들의 실감나는 연기에 빠져 월·화요일을 기다리는(맥주를 준비하고!) 요즘입니다.

영화감독인 지인은 “난 ‘조작’을 보다 궁금한 게 생겼어요. 기자들은 상사를 부를 때 정말로 ‘님’을 빼나요?” 하고 물어봅니다. 맞습니다. 언론은 차장, 부장, 국장은 물론 주필, 사장도 ‘님’을 빼고 부릅니다. 말 자체가 호칭이자 존칭이기에 ‘님’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론 내부에서는 현장에서 취재할 때 기자는 독자를 대표하기에, 기가 죽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같은 분야에서, 지위나 나이ㆍ학예(學藝) 따위가 자기보다 많거나 앞선 사람도 ‘선배님’이 아니고 선배입니다. 존칭이 포함된 말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은 ‘간결성’이라는 언어의 가치에 어긋납니다.

그런데 간결성 등 언어적 문제를 떠나 ‘직급+님’의 호칭은 일반 기업에서도 듣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수평적·자율적 조직 문화를 확산해 신속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대신 ‘이름+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프로’라 칭하기도 하고, 존칭 없이 영어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호칭만 바뀐다고 조직이 수평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호칭에서의 직급 파괴 바람 자체가 제겐 몹시 신선하고 상쾌하게 느껴집니다.

그건 그렇고 압존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얼마 전 S신문사 차장인 후배 K는 압존법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하더군요. 국장(저도 아는 사람)한테 보고하는 과정에서 “제 부장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라고 말한 이후 ‘언어 예절도 없는 놈’으로 찍혔다네요.

압존법은 한자로 壓尊法이라 씁니다. 존대하려는[尊] 마음을 눌러서[壓] 하지 않는 화법(話法)입니다. 한마디로 청자(聽者) 중심의 높임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윗사람이더라도 청자보다 낮은 사람에 대해서는 높이지 않아 듣는 이를 존중해 주는 화법이지요. 예를 들면, 손자가 할아버지 앞에서는 아버지를 높이지 않아야 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오셨습니다”가 아닌 “할아버지, 아버지가 왔습니다”라고 말해야 언어예절에 맞는 것이죠.

그런데 K의 국장은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K가 지나치게 높이니 불쾌했던 것입니다. 국장도, K도 이해가 갑니다. 압존법은 논리적으론 간단하지만 실생활에선 괴로운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표준화법에서 압존법은 완화되는 추세입니다. 화자(話者)를 배려해 어느 정도의 높임을 허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K의 상황이 궁금하시다고요? 제가 K의 국장을 만나 잘 해결했습니다. (그 국장은 K와 제가 아는 사이인 줄 모른답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압존법을 슬쩍 꺼냈죠. 그리고 “압존법은 가족이나 사제(師弟) 간처럼 사적(私的)이고 친밀한 관계에만 적용됩니다. 직장 등 공적(公的) 관계에는 압존법이 적용되지 않죠. 워낙 곤란한 상황이 많아서요”라고 말하니, 그 선배 “어이쿠! 내가 최근에 크게 오해한 일이 있었네” 하더라고요. 우리말로 먹고사는 후배가 한 말이니 신뢰가 갔던 거죠.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 요즘 표준 언어예절은 압존법과 관련해 가정에서도 엄격히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참 아랫사람이 그 바로 윗사람을 높여도 그저 ‘허허허~’ 웃으며 지나가세요.

 

                                                                                                                              

   

노경아

경향신문 교열기자·사보편집장, 서울연구원(옛 시정개발연구원) 출판담당 연구원을 거쳐 현재 이투데이 교열팀 차장. 우리말 칼럼인 ‘라온 우리말터’ 연재 중.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2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부시시 (121.XXX.XXX.123)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해본 사람으로서 좀 어색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딸내미 뻘 여비서가 내가 사무실에 온 걸 회장에게 인터폰으로 보고하면서 "아무개 부장 왔습니다" 할 때 왠지 기분이 안 좋더군요. 그렇게 말하라고 철저히 교육을 받았는지 한 번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했어요.
답변달기
2017-08-29 09:57:48
1 0
라온 (121.XXX.XXX.123)
압존법을 ‘앞존법’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더 앞에 있는 사람만 높이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ㅎㅎ 한자 교육의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답변달기
2017-09-01 14:17:07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