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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교 25년, 대만을 다시 생각한다
허영섭 2017년 09월 04일 (월) 00:01:33

우리 정부가 대만과 관계를 끊은 지 어느덧 25년이 지나간다. 1992년 중국 수교와 동시에 전격적으로 단교 조치가 취해진 것이 대만과의 관계다. 무심한 세월처럼 양국 관계가 무심해진 것이 가슴 아프다. 정상적인 관계에서도 간혹 마찰이 빚어져 사이가 틀어지기도 하지만 그동안 아예 공식 교류를 끊고 지냈으니 충분히 잊힐 만한 기간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국과의 수교 4반세기를 평가하는 여러 언론 보도의 어느 구석에서도 대만에 대한 기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 현실이다.

대만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들어선 중국과의 관계가 그만큼 밀접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막강해진 만큼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베이징(北京)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코에서 폭풍을 일으킨다”고 했는데, 지리적으로 바로 인접한 우리 입장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중국 정부는 아예 대만 얘기를 일언반구도 꺼내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대만도 중국의 일부라는 논리에 의한 일방적인 요구다.

그 결과 국가 호칭부터 달라져 버렸다. 지난날 대만을 부를 때 사용되던 ‘중화민국’이나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공식 외교문서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혹시 간헐적으로 거론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 ‘대만’이리는 정도다. 대만 단교와 동시에 ‘중국’이리는 국호는 ‘중공(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겨졌다. 중화 민족의 정통성도 함께 넘어갔음은 물론이다. 지금의 중국이 6·25 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등 한반도 분단의 당사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역사의 이율배반이다. “외교무대에서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경구를 떠올릴 뿐이다.

더욱이 대만은 우리의 전통 우방이었다. 일제의 견제 속에서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를 은밀히 지원한 것이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국민당 정부였다. 제2차 대전 당시이던 1943년 연합국 수뇌부가 모였던 카이로 회담에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도록 내세운 것도 장제스였다. 국민당 정부가 마오쩌둥(毛澤東)의 총공세에 밀려 지금의 타이완으로 쫓겨간 뒤에도 분단의 동병상련으로 인해 양국 관계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첫 재외공관으로 개설된 것이 타이베이(臺北) 대사관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오랜 친구’라고 부르면 그들은 ‘라오펑요우(老朋友)’라고 화답해 왔다.

그렇다고 너무 감상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려웠던 처지의 우리를 도왔다고 해서 장제스 정부에 대한 미련과 집착에 머무른다는 것도 그다지 현명한 처사는 아니다.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 현지 민중을 억누르는 독재정치로 지금에 이르러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는 점에서만이 아니다. 현재 대만 국민들이 스스로 인식하는 국가적 정체성은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국민당에서 민진당으로 정권교체가 두 차례나 이뤄진 것이 그런 결과다.

더욱이 25년 전의 단교 당시로 돌아가 본다고 해도 대만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난날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역사를 주름잡던 주체로서의 정통성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만이 유엔에서 축출되면서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까지 지금의 중국에 넘겨준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대만의 최대 후원국이던 미국도 대만과의 공식 관계를 끊고 중국과 수교에 이른 터였다. 대만의 반발이 따랐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우리가 북방정책을 내걸고 1991년 옛 소련에 이어 이듬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을 포기하기에 이른 과정이다.

당시 중국과 벽을 헐고 서로 손을 잡아야 했던 당위성도 인정해야만 한다. 중국은 군사·외교적인 영향력을 떠나서도 이미 경제적으로 확실한 기반을 다져가던 중이었다. 아직 비수교국이던 우리와도 교역 규모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중국은 서울아시안게임(1986년)과 서울올림픽(1988년)에 참가했고, 우리도 베이징아시안게임(1990년)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다. 그 잠정적인 관계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고, 결국 수교에 이른 것이었다. 수교 이후 여러 분야에서 양국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온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의문점은 우리가 중국을 선택하면서 대만을 포기했는데도 중국은 왜 북한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을 향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우리 정부에 대한 질문이다. 대만과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주장하는 중국으로서는 당연한 요구 조건이었겠으나 그것을 받아들인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대만을 포기해야 했다면 중국도 당연히 북한과의 관계를 청산하도록 요구해야 했다. 바로 그 전 해 남북한이 동등한 자격으로 유엔 동시가입이 이뤄지긴 했지만 우리 헌법으로는 북한도 엄연히 대한민국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국에 대해 북한과 손을 끊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외교의 현실이다.

지금에 와서 대만과의 관계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대만 정부도 미국이나 일본에 기대려고는 해도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거리를 두려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지난해 차이잉원(蔡英文)의 민진당 정부가 출범하고는 ‘신(新)남향정책’을 표방하며 오히려 동남아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양국의 민간 교류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고는 해도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가 반드시 우호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 수교 25년을 맞아 우리가 극심한 사드 보복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대만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여지를 일깨운다. 사드 배치가 우리의 기본적인 안보 문제라는 점에서 중국의 보복은 터무니없는 처사다.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는 북한에 대해서는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불균형 구도가 단시일 내에 끝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비록 늦어지긴 했지만 대만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정식 외교정책의 하나로 포함시키지는 않더라도 민간교류를 통해 양국 관계를 모색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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