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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이 많고 다양한 나라
임철순 2017년 09월 05일 (화) 00:02:40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의 전집이 국내에서 출간되고 있습니다. 전체 120여 권 규모의 전집을 기획한 출판사는 8월에 1차분으로 ‘마르크스’ 등 3권을 냈습니다. 레닌이 1893년부터 1923년까지 30년 동안 쓴 글로 구성되는 전집은 워낙 규모가 커서 출판사는 월 정기 후원회원 방식으로 독자들을 모으고, 전집을 활용한 독서모임을 최대한 도울 것이라고 합니다.

레닌이라면 한국인들에겐 아직도 불안과 기피의 대상일 수 있는데 전집을 내는 이유가 뭘까. 출판사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최초로 건설한 레닌주의를 복원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며, 그 대안을 찾는 여정”이라고 의의를 밝혔습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였던 지난해에는 그의 작품 44편을 수록한 ‘셰익스피어전집’이 나왔습니다. 전 작품을 한 권에 다 담은 이 전집은 셰익스피어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의 집념의 소산입니다. 특이한 체재와 편집이 돋보이는 기념비적 출판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둥지의 철학자’ 박이문(1930~2017)의 인문학전집 10권은 2016년에 발행된 데 이어 88세를 맞은 해이자 타계한 해인 지난해 특별보급판이 나왔습니다. 공부와 저술로 한평생을 보낸 시인·문학평론가·불문학자의 도저한 사유와 만날 수 있는 저작물입니다. 또 다른 ‘인문학 멘토’ 문학평론가 김우창(80)의 전집 19권도 2016년에 간행된 바 있습니다.

올 들어서는 이효석(1907~1942), 서정주(1915~2000), 윤동주(1917∼1945), 이청준(1939∼2008) 등의 문학전집이 잇달아 출간됐습니다. 대하소설 ‘녹두장군’의 작가 송기숙(82)의 중·단편전집 5권은 11월에 나온다고 합니다. 7월에 소설전집을 낸 윤후명(71)처럼 생존 작가의 전집도 종종 나오고 있습니다.

어느 분야든 한 개인의 일생을 담은 전집은 많고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전집이 많은 나라가 문화적으로 앞선 나라이며 지식 강국이며 사유의 폭이 넓은 나라입니다. ‘번역’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면서 서구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에는 온갖 분야, 별의별 전집이 다 나와 있습니다. 국민작가라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의 경우 전집과 연구서는 물론 그를 연구한 사람에 대한 연구서까지 나와 있습니다.

우리도 좀 더 다양하고 폭 넓은 전집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해외 유명인들의 고전도 좋지만 우리 고전의 국역은 물론 역사와 사상사 문학사에서 소외되거나 잊힌 근현대 인물을 많이 발굴했으면 합니다.

여성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정당한 조명이 필요합니다.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 김명순(1896~1951)의 전집은 2010년에야 나왔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한 사회주의 작가’라는 박화성(1903~1988)의 경우 2004년에 전집(전 20권)이 나왔지만, 이것도 여성으로서는 드문 사례입니다.

전집 출판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유족과 제자, 전문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편집위원회를 구성해 흩어진 작품을 찾아내고, 판본에 따라 다른 내용과 표현을 바로잡고, 얽히고설킨 저작권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유족과 제자가 변변치 않은 경우는 어려움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기간도 많이 걸립니다. 모두 34권인 ‘이청준전집’은 2008년 2월 첫 편집회의를 시작한 이후 2010년부터 매년 3~6권씩 발행해 10년 만인 올해 7월에야 완간했습니다. 그렇게 전집을 내더라도 독자가 소수의 연구자들밖에 없어 수익을 내지 못하니 전집 출판은 큰 부담이며 모험입니다.

시비에 휘말리면 더 힘들어집니다. 8월에 완간된 ‘미당 서정주 전집’(20권)은 5년이 걸렸지만 내고 나니 ‘친일과 부역(附逆), 역대 정권을 찬양한 시인’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됐습니다. 편집진은 “잠실운동장에 잡초 몇 개가 있다고 운동장을 갈아엎어야 하겠는가”라고 반문했지만, 미당이 잠실운동장 만한 큰 잔디밭인지 의문이라거나 초기 시 외에는 볼 게 없다는 비아냥까지 들립니다.

편집진은 이미 나온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은 다 뺐다는데 그러지 말고 작품 전체를 다 찾아 수록하면 오히려 좋지 않았을까요. 태평양전쟁에 나가라고 일제를 편든 시이든 이승만 찬가든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가’든 뭐든 다 싣는 거지요. 이와 함께 1974년 겨울 민주화운동 당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를 맞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서’라며 성금을 냈던 행적 같은 것도 함께 실어야 합니다.

나름대로 정한 원칙에 따라 특정 작품을 빼거나 부각시키는 것은 전집 편찬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집이 선집과 다른 것은 그 사람의 전모를 알게 해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미당의 경우라면 발표된 작품은 다 싣고, 시대적 배경과 미당의 심리상태에 대한 분석은 해설이나 평론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건이 열악한 전집 출간을 문화당국이 지원하는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지만, 우리도 이제 사전(辭典이든 事典이든)이 풍부한 나라, 전집이 풍성한 나라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과장과 왜곡이나 진영의 논리에 관계없이 정대하고 구김 없는 훼예포폄(毁譽褒貶)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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